아침에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광화문 이마 빌딩 근처를 뛰면서 몸을 풀던 봉달이 이봉주를 봤다. 이봉주씨도 슬쩍 내 쪽을 보는 눈치였다. 오늘 내가 목표한 대로 잘 달릴 조짐인가? 이래 뵈도 내가 연배는 위인 것을. 형 된 마음으로 ‘힘!’ 을 전했다. 살짝 속으로.......
전날 바람부는 날씨에 훈련의 여파인지 약간의 감기 기운과 설렘으로 잠을 설친 탓에 머리가 멍하고 몸이 붕뜨는 듯하였다. 아내도 나 때문에 새벽잠을 설치며 찰밥까지 해줬지만 몇 술 뜨지 못해 약간의 허기가 왔다. 게다가 새벽 추운날씨라 몸이 으스스했지만 감사하게도 근처 회사체력단련실이 개방되어 몸풀기엔 안성맞춤인 장소가 되었다.
미리 회사에 나와 커피와 먹거리 등을 마련해준 기현님 선아님에게서 다시 한 번 끈끈한 연대감이 느껴졌다. 그들은 정작 본인은 뛰지도 않으면서 동료와 근처 달림이들을 위해 새벽부터 봉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나와 함께 뛰게 되는 용식형(8년째 마라톤 메니아)도 당일 새벽에도 5키로 조깅을 할 정도로 그동안 열심을 다해 운동했다는데, 이번엔 기필코 4시간 이내 완주하여 연습한 결과가 잘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시간이 되어 동료들과 ‘파이팅!’ 을 외치고 각기 자기 그룹별로 헤어져 출발선에 섰다. 메이저 대회는 무엇보다 그 엄청난 인파로 인해 출전자들에게 가슴 벅찬 흥분과 기대감을 갖게 하는 듯하다. 배동성의 사회로 배석한 인사들이 소개되고 이번에 특별한 사연으로 참가하게 된 분들이 소개 됐다. 전국에서 모인 출전선수가 2만 4천명이라는데, 말이 그렇지 과거 월드컵 4강 신화때의 인파를 능가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동아마라톤 처녀 출전인 나는 F그룹에 배정받고 정시(8시)가 아니라 제일 후미부분에서 출발(8시 21분)하게 됐다. 작년 처음 풀코스를 뛸 때의 기록이라면 B그룹에 배정되었어야하지만 그냥 주는 대로 번호표를 받은 탓이다.
지난번 주로에서 겪은 곤란이 생각나 출발 직전 화장실을 다녀오고 이젠 정말이지 뛸 일만 남았다. 곧이어 출발신호가 연이어 터지며 힘찬 발돋움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눈앞이 말 그대로 인산인해다. 기실 이번처럼 많은 인원과 함께 뛰어본 경험이 없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여유 있게 가보려고 F그룹에서도 늦게 출발했던 것인데 옆 주자들과 페이스를 맞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오늘 목표인 서브쓰리 달성은 초장부터 물 건너 갈 게 뻔했다.
서브쓰리. 이른바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꿈의 기록. 마라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선 하나의 커다란 분기점이 될 만한 기록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나 또한 우선은 그 기록을 목표로 열심을 다해 달려 왔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다. 겨우 마라톤 일년차로서 이런 바람은 과욕이라 말해야 한다. 하지만 과욕이 아니었음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남대문 앞을 돌아 나서면서 힘이 남아 돌 때 앞서나가기로 했다. 이럴 때 오버페이스를 주의해야 한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페이스가 늦다고 판단한 셈이다.
주자들을 헤치고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잠시 뒤엔 그마저 안되겠어서 아예 경찰 경계선을 넘어 보도블럭으로 뛰다가 다시 돌아오는 상황이 반복됐다. 보도블럭에서도 중간에 소변보러 갑자기 튀어 나오는 사람 때문에 깜짝 놀라 부딪힐 뻔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다행인 것은 3시간페이스 메이커(페메)부터 5시간 페메까지 10분 단위로 페메가 풍선을 달고 뛰고 있어서 자신이 현제 어느 정도 페이스로 달리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쉬웠다. 후미주자를 이끌고 뛰는 5시간 페메부터 10분단위로 차근차근 페메를 구경하며 추월해 나가는 건 내가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출발하면서 내심 10키로쯤 가면 어느 정도 주로가 정리 되겠지 싶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과연 내 앞에 서울시내의 차로가 확 뚫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차 없는 서울의 도심 거리를 마음껏 활보하리라던 기대는 최상위권 선수들이나 누릴 수 있는(혹은 허락된) 호사인 셈이었다. 15키로를 넘어서면서 아직까지도 주자를 피해 페이스를 높이거나 줄이는가하면 길옆으로 들어서면서 갑작스런 돌출물까지 피해가는 상황까지 연출됐다. 이제는 마치 마라톤을 하는 것인지 인파를 헤집고 나가는 것인지 분간이 안됐다. 그리곤 점차 다리도 뻐근해지면서 은근히 짜증까지 생겼다.
하프부분 지나면서 기록이 1시간 33분여를 가리키자 내입에선 작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젠 기적이 아니라면, 서브쓰리는 물건너 간 셈이었다. 게다가 아직도 헤쳐 나갈 주자가 산더미처럼 많다는 생각이 들자 뛸 의욕도 현저히 감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겨우 3시간 30분 페메와 조우하면서 희한하게도 새 힘이 솟는 듯했다. 잠시 목표를 수정하기로 하고 앞으로 남은 거리는 3시간 20분 페메를 만나는 것으로 정했다.
25키로쯤 지날 무렵이었을 것이다. 거리 응원하시는 분들이 우리의 희망 봉달이 이봉주가 2시간 8분의 기록으로 1등 먹었다며 파이팅을 외쳤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왓! 대단한 봉달이. 38세에 세계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다니 말 그대로 살아있는 전설이 아닌가. 이 소식을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파이팅을 외쳐주는 길거리 응원자의 마음이 넉넉하고 따뜻하게 전해져 왔다. 나도 너무 기적 같아서 그게 사실이냐고 재차 묻고 싶었지만 우선은 지친 내갈 길이 급했다.
이때 쯤 슬쩍 허기가 느껴져 파워바(에너지 보충제)를 물고 재차 힘을 내보지만 속도는 더 이상 붙지 않았다. 발에서도 신호가 왔다. 입때껏 잘 버텨왔으니 왼발바닥 물집과 양쪽 검지 발톱하나씩을 헌납하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마라토너에게 이런 것쯤 문제도 아니다.
힘이 아니라 의지와 정신력으로 뛰게 된다는 30키로 이후 구간. 지금까지가 체력전이라면 이때부터가 평소 극기 훈련을 얼마나 성실하고 알차게 해왔는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점이 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정신의 승리랄지, 마인드 콘트롤이 이럴 때 유용하겠구나 싶기도 하다. 그만큼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욕구가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애시당초 이 고생을 뭐하러 시작했던가 하는 회의도 밀려오고 이런 중노동을 하면서 대체 내가 무엇을 얻고자 무엇을 원했던 것인가 하는 목표의식도 희미해진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처음의 나를 듯하던 기세는 어디가고 자신의 다리가 철근덩어리를 메달고 뛰는 것처럼 묵직하게 굳어옴을 느낀다.
주변 곳곳에 이제는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시는 분들과 쥐가 올라와서 스트레칭을 하시는 분들, 그리고 앞으로 오래 뛴 근육의 부담 때문인지 아예 뒤로 걷고 뛰기를 반복하시는 분들도 있고 다리를 끌고 가듯이 팔을 힘차게 움직여 앞을 향해 움직이시는 분도 눈에 띄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지난 첫 풀코스 완주 때의 망가지는 내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처럼 되지 않으려고 지난겨울 그토록 열심히 연습해 오지 않았던가. 최소한 이번엔 걷지는 않겠다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힘든 건 나 또한 어쩔 수 없어서 이후론 급수대마다 물을 조금씩 마시며 잠시 뛰는 발걸음을 늦추는 방식으로 페이스를 조절했다.
35키로미터 부근 잠실대교를 건너자 어느 여성분이 박하사탕을 엿 판처럼 벌여놓고 건네준다. 허기진 김에 몇 개를 집어 우두둑 씹으니 입안을 감싸고도는 게 그지없이 달콤하다. 분명 대회진행 요원은 아닌 듯한데 자원하여 그런 먹거리를 내놓는 마음이 생각할수록 귀해 보인다. 결승점이 다가오면서 점차 길가의 응원인파도 더욱 많아졌다. 역시 큰 대회를 출전해봐야 하는 것인가? 응원하는 사람도 하나 같이 진심으로 힘을 전해주는 듯하다. 힘들어서 그런지 가슴이 뭉클했다. 이 때부터 나는 약간씩 입을 움직여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힘!힘! 구령을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잠실대교에서 석촌호수를 지날 때까지 가장 힘든 구간을 그 달콤함의 힘으로 뛰어간 게 아닐지.
어느덧 40키로를 지나고 있었지만 내 눈엔 아직 3시간 20분 페메가 보이지 않았다.(* 3시간 20분 페메는 8시 5분 무렵 A그룹과 함께 출발했으므로 내가 그 페메를 따라가면 내가 8시 21분에 출발한 사실을 감안하여 약 3시간 5분의 기록을 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오늘 내게 허락된 시간이 기어이 여기까지인가.
이제 남은 2.195키로미터 구간 동안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유일한 과제로 남았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역시 말이 쉽다. 자기 목표시간대를 넘어서 달리는 마라톤 최종 구간은 의미 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이럴 때는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용기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무슨 자학을 이리도 심하게 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마라톤은 자학이 될 수 없는 것을.
정신력도 정신력이거니와 이미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하고 깡그리 소진된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는 기름 한 방울의 힘으로 달리는 느낌이다. 만일 끝에 그런 힘마저 남아있지 않다면 퍼질 수밖에 없고 마라톤에서 그런 일은 다반사다.
잠실체육관 입구가 보였다. 이제 끝이다. 마지막 피날레를 어떻게 장식할까, 결승 트랙을 돌면서 슬쩍 이런 생각들이 맴돌았다. 오늘 목표한 바는 이루지 못했다. 허면 조금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통과할까? 문득 지난번 처음 풀코스를 뛸 때 결승점에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 모습의 내사진이 떠올랐다. 그 땐 정말 몹시도 힘들었지만 또 다시 그런 표정 지으며 결승점을 밟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찡그린 얼굴에 입꼬리를 살짝 올려 보았다. 그게 가능하다니 스스로 놀라웠다. 두팔은 어느새 번쩍 들려있었고 승리의 V자와 얼굴엔 환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 이 장면이 다른 분에게 가려 사진에 찍히지 못하다니 아쉬워라....... (3시간 11분 40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