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능이란 강력한 서비스와 발리, 스트로크만이 아니다. 열심히 하고자 하는 노력 이것 역시 재능이다. "
우연히 펼쳐본 테니스 잡지에서 어느 선수가 한 이 말을 나는 출발선에서 되뇌고 있었다.
달리기라면 내내 친구들 뒤통수를 보고 달려야했던 과거의 콤플렉스를 이 글이 마법처럼 이 저주를 풀어버렸던 것이다.
40대가 운동화 끈을 조인다는 것은 20대 때와는 다른 절실함이 있다.
어쩌면 비장함이라 해야 좋을지 모른다.
신체의 무기력한 변화와 스트레스는 늘어나는 체중과 허리사이즈가 잘 웅변하였고 가족력이던 혈압 역시 160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물론 세상의 무게 역시 항상 임계점을 오르내렸으니깐.
어떤 운동이든 해야했고 나는 달리기를 선택했다.
미치도록 빠른 이 스피드의 시대에 차도 아닌 발로 42.195km를 달린다니..
이거야말로 정말 멋진 일이 아닌가.
나에게 마라톤은 이 시대의 유일한 역설적 탈출구였던 것이다.
나는 달리고 그저 달렸다.
가까이 있는 운동장을 5바퀴 6바퀴...
하지만 달리기가 5킬로벽을 돌파하자 나는 단지 달리는 이 단순함에 그만 매혹돼버렸다.
산이 있어 산을 오른다는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난 이렇게 마라톤 풀코스 출발선에 서있는것이다.
이천에 살면서 굳이 전라 광주까지 내려가서 도전을 하게 된 건 이 곳이 고향과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곳에서 무기력한 내 인생을 다시 출발시키고 싶었다.
목표 시간은 3시간 45분
다행히 페이스 메이커가 있어서 그 뒤로 붙었다.
레이스가 한결 쉬어질 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출발 1분전
초등학교 운동회 때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옆 사람에게 들릴 정도다.
아까 조여매었던 신발끈도 왠지 헐렁해보인다.
급하게 다시 조여매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꽉 조인 느낌이다.젠장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출발
맙소사 진짜 하는거야?
출발하고 5킬로
5킬로 지점까지는 힘을 최대한 아껴야한다고 다짐한다.
초반 5킬로가 중요하다고 누누히 들어왔던 터.
하지만 페이스 메이커와 또 여럿이 뛰다보니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었다.
알아서 적절히 이끌어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또 이 대회 코스는 4킬로 지점부터 11킬로 지점까지는 내리막이라 그리 힘들지도않다.
그 때 옆에서 우려하던 말이 나온다.
" 돌아올 때도 이 코스인데 이거 걱정이구만 "
정말 그랬다. 돌아오는 31킬로에서 38킬로가 오르막이니깐.
그렇다고 무작정 시간벌기로 뛰쳐나갈 수도 없잖은가.
걱정이 되지만 꼭 완주하리라 다짐한다.
그때 오른쪽 무릎이 따끔거린다.
이런, 장경인대임이 틀림없다. 자주 아파봐서 알 수있다.
왼쪽만 아팠는데 뜬금없는 오른쪽이다.
뛰면서 살짝 만져줬지만 나아질리 만무다.
전에도 이 정도 아픔은 견디고 뛰었다고 독하게 마음먹는다. 비록 하프길이 정도였지만.
다리에 신경을 안쓰고 자세에만 집중하니 조금 나아진 것도같다.
5킬로에서 10킬로
다리가 조금씩 따끔거리지만 여러명이 같이 뛰어선지 몸이 오히려 상쾌해진다. 사실 나는 지금껏 혼자서만 뛰어왔던 것이다.
여러 명의 발자국소리가 심장의 박자와 어우러져 뛰기가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10킬로에서 반환점 - 첫 번째 위기 -
52분이 지나고있다.
10킬로를 벗어나자 욕심이 생긴다.
지금 속도보다 조금 속도를 높여도 되겠다는 생각이든다.
연습할 때도10킬로에서 20킬로까지는 항상 속도를 높였었고 그러고 나서도 괜찮았던 것을 32킬로 연습에서 경험했던 것이다.
결심을 하고 그룹에서 점점 뛰쳐나간다.
12킬로까지 보폭을 늘리자 발걸음이 오히려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갑자기 오른 무릎에서 격렬한 통증이 찾아온다.
뛰다가 말고 장경인대쪽을 만진다.
10여초 마사지해주다 다시 뛰려하지만 무릎이 꺾이고만다.
아무래도 인대가 늘어난게 틀림없다.
다리를 만지며 고개를 떨군다.
이대로 끝내야하나?
첫 번째 도전에서 주저앉으면 다음 도전도 자신이 없을 것같다는 생각, 하지만 이대로 뛰다간 큰 부상이 올 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반반이다.
부상이 나아질 수는 없고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
그때 아들과의 약속이 떠오른다. 2주전 아들 녀석은 생일 선물로 내가 풀코스를 완주하기를 원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전 나는 이 곳에서 인생을 다시 출발하자 다짐을 안했던가
마음은 정해졌고 돌덩이처럼 확고하다.
이 대회를 위해 나는 지난 3개월간 500킬로 이상을 뛰었지 않았는가
뛸 수 있을때까지는 해보자고 다짐을 했을 때 3:45분대의 그룹이 내 옆을 지나간다.
다행히 그 순간 마온에서 보았던 글귀가 생각난다.
-통증이 온다면 주법을 바꿔보라.-
돌이켜보니 보폭을 늘리면서 통증이 더 심해진 것도같다.
보폭을 줄이며 달리니 감사하게도 통증이 많이 사라진다.
좋아! 화이팅!을 외치며 다시 뛰기 시작한다.
되도록 즐거운 생각을 하려 애쓴다.
여기서 퀴즈 하나
다음 중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1) 지구력 2) 근력 3) 스피드 4) 순발력
답은?..............
4)번 순 .발. 력
곰곰히 생각해보라.
생각을 긍정적으로 이끄려 애쓴다.
목표 그룹을 따라잡는데 40분이 걸렸다.
이제는 다시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모든 생각을 자세에 집중한다.
어느덧 반환점이 보이고 파워겔을 하나 꺼내먹는다.
5킬로마다 물은 빠짐없이 먹어둔다.
1시간 51분. 2분의 여유가 생겼다.
반환점에서 30킬로
23킬로에서 다시 무릎이 아파온다.
달리기를 멈추고 다시 마사지.
이러기를 서너번 반복하다보니 그룹과 다시 떨어진다.
그 때 페이스 메이커가 소리친다.
" 저희들과 1 m 이상 떨어지지마세요. 한 번 뒤처지기 시작하면 끝입니다. "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페이스 메이커중 한 사람이 우리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 주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세상이 힘들다고만 할 게 아니다.
다시 힘을 내 그룹과 합친다.
보폭과 자세에 신경쓰면서 달리다보니 30킬로에 와서도 호흡이 괜찮다.
탈락자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31킬로에서 38킬로 - 두 번째 위기 -
우려했던 오르막이 시작되려하고있다.
마음이 착잡해오면서 30킬로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입을 다문다.
32킬로가 가까워오면서 점점 머리 속에서 한 단어가 뭉게뭉게 피워오르고있다.
< 마라톤 벽 >
마라톤선배들이 꼭 만나게 될거라 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32킬로가 되어오자 이 녀석이 이미 내 곁에 와 있다는 것을 몸이 느끼고 있다.
물론 인사는 하지않았다.
가벼웠던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그룹을 따라가는 것이 조금은 힘겨워진다.
이제 진짜 마라톤이 시작된 것이다.
34킬로 까지는 그래도 완만한 오르막이고 내리막도 있어서 버틸만 하다.
하지만 38킬로까지는 줄곧 오르막이다.
탈락자가 속출한다.
목표 그룹은 이미 앞서 가버리고있다.
3개월간 훈련하면서 마음 한 구석 한 가지 찜찜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근력훈련을 게을리 한 게 그것이다.
정말 그랬다.
심장은 장하게 버티고있는데 근력이 버티지 못하고있다.
근력운동이라고는 고작 팔굽혀펴기가 전부였으니...
추월해가는 달림이들의 울퉁불퉁한 종아리근육이 무척 부러워진다.
이 대회가 끝나면 역기를 들고 살리라.
3시간 45분의 기록은 물건너갔고 완주하느냐 마느냐가 문제다.
지옥같은 오르막이 계속되고 다리는 힘을 잃어간다.
38킬로를 지나친다.
38킬로에서 골인까지 - 마지막 위기 -
38킬로를 지났으나 다리가 마음같지않다.
결국 오르막을 겨우 올라온 다리에서 글리코겐이 고갈돼 버린 것일까
다리가 서버린다.
걷다가 뛰기를 반복
길가에서 화이팅을 외쳐주는 시민들의 박수소리가 힘이되어준다.
겨우 4킬로 남았다.
하지만 아직도..라는 생각이 앞선다.
손이 저려온다.
다리에 모든 힘을 쥐어짜주고있는것이다.
마지막 오르막이 보이고 학생들이 손을 내밀며 반긴다.
손바닥을 스치며 오르막을 다 오르니 경기장 입구가 보인다.
단지 400m 만이 남았을 뿐이다.
가슴에 말로 표현할 수없는 벅참이 밀려온다.
앞서 달리는 한 사람을 젖히면서 드디어 골인
시계는 3시간 49분을 지나고있다.
배가 고파왔지만 모든 게 감사하게 느껴진다.
페이스 메이커, 길가의 시민, 같이 달린 동료 모두가 고마워진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괜시리 눈물이 나오려한다.
칩을 반납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경기장을 나설 때는 다리를 질질 끌 정도로 다리가 아파왔다.
앞에서 나같이 다리를 다쳤는지 다리를 끄는 사람이 보인다.
그가 친구인듯한 사람에게 한 마디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