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81
Read: 1454, Vote: 7, Date: 2017/01/16 07:35:13
글 제 목 백색 라인(1)
작 성 자 애숭이
심승범은 사장실에 불려갔다.

"어이, 저기말이야 심과장, 뉴욕에 좀 갔다와"

이 말을 들은 것은 10월도 말경이었다.

승범은 당황해 하며,

"네?"

놀란 나머지 그 한 마디만 입에서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것은 차치하고 승범이 사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불과 10여초 전이었다.   이야기의 앞뒤 사정 설명도 없이..

사장은 허름한 사무용 책상을 마주보고 앉아 가슴에는 애완 고양이 타마를 안고 있다.  타마는 엄청 살이 찐 고양이로 손님에게나 승범같은 사원에게도 붙힘성이 없는데 사장의 두터운 손가락으로 턱아래를 쓰다듬어주면 금새 눈을 가늘게 깜박인다.  타마의 갸르릉거리는 소리가 사장실에 낮게 울려퍼졌다.

사원들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사무실의 전화를 받거나 외근을 하는 등의 분위기가 승범의 등뒤 문너머로 느껴진다.  자기도 얼른 업무에 복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임대물건의 조회 예약이 3건 들어와 있어 미아리 아파트 주인과의 계약협상도 해야하고, 저녁에는 종로의 건물주를 모아 접대회식까지 있다.  사장의 말상대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뉴욕이라고 하면 미국의..."

승범이 되물었다.

"당연하지.  연신내 사거리 뒤 술집 뉴욕이라면 나도 한 주에 한 번은 가지"

사장은 마음에 드는 마담이 있는 가게의 이름을 들며 왠지 자랑스러운 듯 코구멍을 벌렁거렸다.  늙었어도 아직 간지난다는 것은 '랜드 부동산 개발' 사장 박광요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승범은 살짝 미간을 문질렀다.  

"뉴욕지사를 만드실 생각이신지요?"

은평구 외곽에서 작은 부동산 개발회사를 운영하는 회사가 갑자기 뉴욕에 진출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이야기다.  10년간 사장의 변덕에 시달려온 승범은 여기서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사장의 헛소리를 적당히 흘려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중요한 임무다"

사장은 위엄있게 말하고 타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타마는 기지개를 켜고 승범의 발밑을 지나 사장실 문에 있는 고양이용 문을 통해 나갔다.  타마가 약간 오그라든 기분으로 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승범은 사장쪽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사장의 책상에 어느새 항공권과 숙박지 정보 등의 서류가 놓여있었다.

"이것은?"

"그러니까 이게 자네의 뉴욕행 항공권과 여권일세"

왜 제 여권을.. 이라고 말하려다 문득 생각이 났다.  3년전에 사장이 돌연 "연말에 사원 전원이 하와이에 간다" 고 선언하고 여권이 없는 사람들에게 취득을 강요했다.  여행사에 수배를 의뢰한 후 그대로 사장이 그걸 보관하고 있었는데 결국 유야무야 하와이 여행은 무산되었다.  아마 연말을 기다리기도 전에 사장의 우크렐레 열기가 식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승범은 해외에도 여행에도 당초 흥미가 없었기때문에 여권의 건은 지금까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것을 사용하여 마음대로 돈도 빌리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마음속으로 사장을 의심하면서 승범은 오랜만에 자신의 여권을 집어들었다.  여권 사진속의 승범은 지금보다도 볼의 윤곽이 조금 홀쭉해 보였다.  하지만 눈아래 다크써클은 뚜렸하게 보인다.  

그때 마침 아내와 잘 되지 않았던 시기로 아마 많이 피로했던 것같다.  승범은 한숨을 섞어 잠시 젊었을 때 기억을 떠올렸다.  그후 해가 바뀌고 조금 지나 짧은 결혼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다.

승범은 이어 항공권을 쳐다보았다.  인천에서 JF 케네디 공항.  정말로 뉴욕행이었다.  출발날짜를 슬쩍 쳐다보았더니

"아니 내일이잖아요!"

"응"

사장은 대답했다.

"사장님 표는요?  설마 저 혼자서!?"

"응"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전 한번도 해외에 간 적이 없습니다.  뉴욕에 뭘 가지고 가야 좋은지 엄두도 안나고 영어도 전혀 통하지 않고 무엇보다 왜 제가 뉴욕에 가야하는 겁니까?"

"거기 가면 뭐든 다 팔아.  한 주가 채 안되는 여행이니까 빈손으로 가.  영어도 필요없어.  그냥 마음으로 말하면 돼!"

"좀 난감합니다!"

"그리고 불편할까봐 여행사에 다 부탁해놓았어"

"여행사?  뉴욕 관광을요..."

"자네 바보야? 왜 자네를 회사비용으로 관광을 보내겠나. 이거야 이것!"

사장이 책상에 휙 내던진 팜플렛에는

[뉴욕 시티마라톤 여행 안내]라고 적혀있었다.



"마.. 마라톤 참가......?"

이혼한 이후 승범은 이전보다 더 일에만 열중했다.  일에 보람을 느꼈기도 했지만 그외 다르게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침식을 잊고 일만 해왔다.  그런 사원에게 갑자기 내일부터 뉴욕에 가라고 명령하는 사장의 전횡.  그것도 외국에서 105리가 넘는 거리를 달리라고 지시하는 무모함이란...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지만 정말 왜 이런 사장을 위해 몸을 불사르면서 일을 해오고 있는지 승범은 문득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과연 박광요라는 이름의 발음대로 불합리한 일들을 사원에게 강요하면서 전횡을 일삼는 폭력적인 에너지의 상징과도 같다.

"이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그런데 왜 저밖에 없다는 것입니까?"

사장은 일어나서 책상을 돌아 까치발을 서서 승범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봐 심 과장 자네 학생시절 장거리 육상선수 출신이잖아?"

물론 그렇긴 하지만 승범은 손가락 끝으로 강하게 미간을 푹 패일정도로 눌렀다.

'사장, 내 체중은 입사후 10년간 10kg나 늘었다고..'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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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이 소설은 뉴욕마라톤을 배경으로 은퇴한 한 육상선수가 해프닝으로 이 대회에 참가했다 어마어마한 대회의 규모에 감탄하면서 진정한 달리기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을 흥미롭고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뉴욕마라톤 참가를 마음에 두고 계신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내용을 본 소설 게시판에 옮겨 소개합니다. 01/21
허철준 마라톤을 하는 달림이들이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정겹운 필체로 감동을 주는 소설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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