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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이] 나를 만나는 마라톤
펌  2015-02-04 17:46:45, H : 2,269, V : 178


우종민 인제대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잘 알다시피 마라톤은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매우 힘든 운동이다. 마라톤을 뛰는 사람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비장하다. 이를 악물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달린다. 저렇게 힘든 일을 왜 하는지 정신의학자로서 궁금했다.

그래서 작년가을 춘천마라톤에 참가 신청을 했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어떤 심리 상태로 뛰는지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몇 년 전에 하프 마라톤을 뛴 적이 있었고 틈틈이 조깅을 하기는 했지만 원래 완주(完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걷다가 뛰다가 하면서 결승점에 기어서 들어 왔지만 나로서는 좋은 공부가 되었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나를 만났다. 대회가 끝나고 붐비는 화장실이었다. 땀을 씻고 돌아서다가 문득 거울 앞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보았다. 눈빛이 살아 있었다. '너 참 애썼다. 끝까지 쫓아왔구나. 그래 아직 죽지 않았어. 나, 살아 있다!' 어서 비키라고 뒷사람이 채근하는 바람에 돌아서 나왔지만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순간 나는 자신을 인정한 것이다.

세상이 나를 배신하고 진가(眞價)를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살맛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마라톤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몸은 쓰러질 지경이지만 마음은 뿌듯하고 살맛이 난다고 말한다. 성취를 통해 자신을 인정하게 됐기 때문이다.

'긍정적 독백(獨白)'이라는 정신훈련법이 있다. 포기하고 싶을 때 "그동안 넌 잘 해왔잖아. 이번에도 할 수 있어"라고 혼잣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평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중장년 남자들도 마라톤을 뛰면서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조직의 한 부품으로 그저 그렇게 소모되고 말 수는 없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고 울부짖고 싶을 때 그 눈물과 분노를 꾹꾹 눌러서 한 발씩 묵묵히 옮긴다. '자 봐라, 내 두 다리로 밀고 가는 나의 실존(實存)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을지라도 나만큼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특하고 유일한 나의 실존을 확인하면서 자존(自尊)을 지킨다.

마라톤은 심리적으로 고민과 갈등을 해소해주는 기능도 있다. 장시간 유산소운동을 하면 우울감이 줄어들고 기분이 좋아진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거나 지레 걱정을 하는 습관도 개선된다. 소위 '분산 효과'이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자꾸 고민거리가 떠오른다면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가서 뛰어보자. 그러면 사고의 집착이 분산되어 흩어진다. 특히 내면의 갈등이 잘 해소된다.

오래 달리다 보면 뇌에서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무릎이나 발이 아파도 고통을 덜 느끼고 심지어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한다. 여기에 시각·청각·촉각 등 오감(五感)의 만족이 더해지면 엔도르핀과 도파민 같은 신경 전달 물질이 펑펑 쏟아진다. 춘천마라톤에서는 양쪽 산에 물든 단풍이 호수에 물그림자로 비치는 풍경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런 시각적 자극이 마약처럼 나를 유혹했다. '저기까지 가면 또 다른 풍경이 있을 텐데. 에이, 저기까지만 가보자'라는 기대를 하니까 고통을 잊었다. 저만큼 가서 뒤돌아보면 이만큼 달려온 나 자신이 뿌듯했다.


        [ESSAY] '나'를 만나는 마라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40㎞를 지나니 골인 지점이 저 멀리 보였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한 발짝도 옮기기 힘들었다. 그때 나를 계속 뛰게 해준 것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시각 장애인과 짝을 이루어 그들의 눈과 귀가 되어서 마라톤을 완주하는 분을 보았다. 그분이 회사에서 어떤 직급이나 직책을 맡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는 인생의 영웅으로 보였다. 그런 영웅은 많았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달리는 아빠, 서로 다른 나라에 이민 가서 사는 형제들이 매년 마라톤대회에서 만난다면서 화목하게 웃고 응원하는 가족들, 멋있다며 힘내라고 큰 소리로 격려해준 학생들 덕분에 나는 내 능력보다 훨씬 더 먼 길을 달릴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마라톤을 혼자서는 뛸 수 없다. 같이 가야 멀리 갈 수 있다.

이제 봄이 되면 다시 마라톤대회에 참가할 생각이다. 그전에 우선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연습을 해본다. 가볍게 조깅을 하면서 내 몸과 마음에만 온전히 정신을 집중하고 몰입한다. 눈으로는 새벽에 깨어나는 도시와 강변을 즐기고, 귀는 자연의 소리에 기울인다. 양 볼과 팔다리에 스치는 바람도 느껴본다. 온몸의 감각을 모두 열고, 오감을 느끼다 보면 일종의 명상 상태에 도달한다.

플라톤은 '시가(詩歌) 교육과 체력 단련 교육을 결합해야 영혼을 균형 있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 방법은 얼마든지 다양하다. 다만 실행이 문제일 뿐이다. 아는 것은 힘이 아니다. 하는 것이 힘이다.

올 한 해를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이제 겨우 4㎞ 정도를 지난 셈이다. 벌써 지쳐서는 곤란하다. 몸과 마음을 잘 다독여서 모두가 결승점을 통과하자. 좋은 사람들의 손을 꼭 잡고.

출처 : 2월 4일자 조선일보

기막힌...
 (2015-02-04 18:06:36)

내용 참 잘 쓰셨네요..많이 배웁니다..마라톤은 동적인운동이 아니라 정적인 운동같아요...참선하고..도를닦고..해탈의 경지로 향하는 수행의 길..


링크..??
 (2015-02-04 18:12:40)

이런내용을 링크걸어 카톡등으로 전달하고싶은데...안되네.??


ㅎㅎ
 (2015-02-05 10:36:16)

마라톤주자로서 느낌이있고 공감이가는글이네여...


초보와 중수사이
 (2015-02-05 10:40:43)

누구에게 보이기위해 달리는 것은 아니다.단지 나자신의 성취감과 건강을 위해 달린다


2/5
 (2015-02-05 15:55:05)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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