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3클럽 | 여성 | 울트라게시판 | 시사게시판 | 구게시판 | 홍보게시판 | 불량게시물신고
 |
 덕유산 대종주 5편 쉽고 편한 길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
| 이정범
|
2021-06-28 10:17:06, H : 4,537, V : 216 |
|
 |
|
|
덕유산 대종주 5편 쉽고 편한 길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덕유산 대종주를 한 지 3주일이 흐른 지금, 그 날을 되돌아보며 나는 그때 치목재에서 왜 더 이상의 대종주를 포기하고 하산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내 자존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약한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고, 나약한 내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변화를 두려워한 적도 있었지만, 쉽고 편한 길에 머물지 않고 때로는 어렵고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변화나 도전 앞에서 내 심리적 한계선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스스로의 순수의지보다는 어떤 보이지 않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리어서인지도 모른다.
치목재에서 골인지점인 무주 남대천 무주교까지 대종주의 남은 구간은 15km 정도 된다. 마라톤 풀코스로 친다면 30km 구간쯤에 해당된다. 풀코스에서 본격적인 마라톤은 30km 정도에서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마라톤 벽이 훈련과 준비가 아주 잘 된 사람에게는 훨씬 이후에 올 수도 있고, 아예 골인할 때까지 안 올 수도 있지만... 나 역시 20여년 동안 풀코스만 100여 회 달리며 시종일관 이렇다 할 벽을 만나지 않고 거침없이 달린 적도 몇 차례 있었다.
더구나 마라톤 벽은 조금만 힘들어도 달리는 것을 포기하고 걷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걷지 않고 계속 달리는 러너에게만 30km 이후가 돌파해야 할 벽이고 넘어야 할 큰 산이다. 나에게는 그 마라톤 벽을 100번 가까이 돌파한 저력이 있다 해도, 내가 풀코스 마라톤에서 일찍이 경험해보지 않았던, 걸어서도 돌파하기 힘든 벽이 지금 내 앞에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지금 내 앞에서는 해발 1,031m의 적상산이 우뚝 솟아 있다. 치목재가 해발 600m 정도 되니 다시 해발 400m 이상을 치고 올라야 한다. 더구나 오르는 길이 완만한 경사도 아니다. 대종주에 앞서 인터넷 검색을 하며 적상산 구간의 고저도를 확인해보니 급경사다. 또한 적상산을 지나 향로봉에서 오동재를 향한 내리막길도 해발 400m 정도의 급경사다. 오늘 대종주 산행의 최대 고비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치목재를 걷고 있는데 안내표시판이 나타난다. 직진하면 적상산, 우측으로 하산하면 안국사 방향의 화살표시가 되어 있다. 안국사까지는 200m 내려가야 한다. 아들은 안국사에서 생수를 보충한 다음 산행을 계속할 것인지 그냥 직진할 것인지를 나에게 묻는다. 내 배낭에는 한 병의 물이 있으니 시간과 체력도 아낄 겸 그냥 직진하자고 하였다. 산에서, 특히 경사진 길에서 왕복 400m는 그렇게 짧은 거리가 아니다.
치목재를 지나니 본격적으로 급경사의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길도 분명하지 않다. 얼마나 경사가 심한지 깎아지른 절벽처럼 두 발로 설 수가 없다. 두 손까지 땅을 집고 네 발로 짐승처럼 엉금엉금 기어올라야 한다. 경사도가 70도를 훨씬 넘을 것 같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급한 경사다. 두 손으로 중간중간 있는 나무나 풀포기를 잡아 당기며 힘겹게 한 발 한 발 오른다.
완전히 절벽을 오르는 기분이다. 잠시도 방심을 할 수 없다. 발을 잘못 디디거나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면 저 밑으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는 아찔아찔한 순간의 연속이다. 몸과 정신이 초긴장이 되고 몸을 움직이는 한 동작 한 동작에 집중하다 보니 오히려 아무런 잡념도 없고, 피로를 느낄 겨를도 없다.
느린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지만 워낙 경사가 급하다 보니 오르는 고도는 쑥쑥 올라간다.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면 치목재가 저 한참 밑에 보일 정도다. 조금 전만 해도 기진맥진했던 몸인데, 내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솟구쳐 나오는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가 신기하다.
그렇게 쉬지 않고 오르다 보니 돌로 쌓아 놓은 성벽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상 가까이에 오른 것이다. 해발 400m나 되는 그 깎아지른 길을 한 달음에 오른 것이다. 잠시 앉아 쉬며 물과 함께 에너지 젤을 섭취한다.
지금 내 배낭에 남아 있는 것은 이제 생수 한 병과 에너지젤 3개밖에 없다. 이 행동식을 가지고 나머지 10몇 km를 버텨야 한다. 성벽을 끼고 도는 산책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치목재에서 적상산 성벽까지 오르는 길은 비법정 탐방로이지만, 성벽에 올라서서 적상산 정상을 거쳐 향로봉까지는 법정 탐방로이다. 성벽은 허물어져 거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이 높은 곳에 힘들게 성을 구축한 걸 보면 옛날에는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 같다. 오랜만에 경사가 완만한 등산로를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걷는다.
적상산 성벽 길을 걸으며 설천봉 이후 구간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중년으로 보이는 부부다. 이때가 이미 오후 4시가 넘어서인지, 그 이후에는 대종주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끊긴 적상산 이후 구간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다. 태양이 점점 고도를 낮추면서 산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즈넉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적상산에서 향로봉까지는 걷기에 아주 편한 완만한 경사의 등산로다. 이런 길을 모처럼 행복하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정면에 나무 울타리가 보인다. 울타리는 가서는 안 될 저쪽 세계와 가도 되는 이쪽 길 사이의 냉엄한 경계다. 잠시 찾아왔던 편안하고 행복한 감정도 여기서 끝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그 나무울타리를 따라 우회하는 편안한 길이 아니라 그 울타리를 넘어서 직진해야 하는 금기의 길이고 도전의 길이다. 나와 아들은 도둑처럼 그 나무 울타리를 넘었다.
예상한 것 이상으로 향로봉에서 오동재를 향하여 내려가는 길도 급경사의 길이 많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돌로 된 등산로가 한참을 이어져 있었다. 이 돌계단이 등산로를 찾는데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지만, 낙엽으로 덮여있는 돌계단길은 무척 위험했다. 낙엽 속에는 어떠한 길이 숨겨져 있는지 육안으로는 도저히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저 낙엽 속에 돌계단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놓을 뿐이었다.
대종주가 종반으로 치닫는 지금은, 표고차 해발 400m의 향로봉에서 오동재로 향한 급한 경사의 내리막길이 치목재에서 적상산을 오르는 급한 경사의 오르막길보다도 훨씬 위험하다는 것이다. 한 발 한 발 내려 딛을 때마다 무릎 위의 체중이 무릎에 온통 쏠리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무릎이 고장이 나면 그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이다. 고장 난 무릎을 이끌고 어떻게 해서든 오동재까지는 가야 사람이 사는 마을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향로봉 내리막길에서 오동재까지는 2km 정도나 된다. 그래서 급한 경사의 내리막길을 걸을 때는 온통 신경이 무릎에 집중된다.
단지봉 구간을 지날 때 이미 간간이 급한 경사의 내리막길에서 바른쪽 무릎이 시큰거리며 경미한 통증을 유발해 초긴장 상태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급한 경사의 내리막길을 걸을 때는 무릎을 45도 정도 굽힌 기마자세로 무릎 위 체중을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에 최대한 분산시키며 조심조심 내려갔다.
아주 이따금씩 찾아오던 그러한 무릎 통증은 그런 자세를 취하며 내리막길을 걸으니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고, 더욱 다행이었던 것은 그렇게 경미한 통증이 왔을 때도 다시 오르막길이나 평지 비슷한 길을 걸을 때는 신기하게도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드디어 오동재에 내려섰다. 안내표시판이 나타났는데, 여기서 640m봉을 지나 무주까지는 5.1km라고 한다. 남대천이 흐르는 무주교까지의 거리가 아니고 하산지점까지의 거리인 것 같다. 오동재에 이르렀을 때 이미 해는 이미 고도를 낮출 대로 낮춰 얼마 후면 시야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무주에서 서울 가는 막차 타기는 이미 글렀고 지금 이 속도로 가면 무주에서 대전 가는 막차도 간당간당하다. 아들은 아직도 체력에 여유가 있는지 서둘러서 걷자고 재촉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대전 가는 막차라도 타볼까 하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설사 대전가는 막차를 타지 못하더라도 아들의 생각은 어둡기 전에 어서 이 산을 내려가고 싶은 모양이다.
오동재를 지나며 등산로는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지만 길은 계속 자기 정체를 쉽사리 확연히 드러내지 않았다. 게다가 몇 개의 봉우리가 아직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높고 거친 능선의 파도는 얕고 부드럽게 가라앉았지만 길은 계속 오르락 내리락하며 출렁였다. 오동재를 지나 앞에 도사린 640m봉은 어두어 가는 저쪽 능선 멀리 괴물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640m봉을 오르기도 전에 이미 날은 어두어졌고 나와 아들은 결국 랜턴을 켜야 했다. 아들은 내 앞에 서서 한 쪽 손에 랜턴을 켜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계속 켜 놓은 채 트랭글을 이용 계속 길을 열어나가고 있다. 앞장서서 길을 찾느냐고 나보다 체력소모가 훨씬 클 터인데 뒤에서 쫓아가는 내 발길이 더 분주하다.
640m봉에 올라서니 저 멀리 밑으로 무주 시내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불빛들이 보인다. 도시의 불빛이 그렇게 반갑고 정겨울 수 없다. 마음은 한달음에 달려 내려가 저 불빛에 얼른 안기고 싶다. 그런데 가도 가도 능선은 꾸불꾸불 이어져 있고 걷고 있는 능선의 고도는 좀체 낮아지지 않는다.
무주에서 대전가는 오후 8시 30분 막차도 이미 글렀다. 지금은 무사하게 하산하는 것이 마지막이자 유일한 목표다. 어차피 무주에서 하룻밤 잘 생각을 하니 마음이 평온해진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관성에 의해 몸은 멈출 생각 없이 기계처럼 앞으로 나가고 있다. 신기하게도 몸 어디에도 안 좋은 징후는 하나도 없다. 내가 내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어 가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얼마 후에 임도가 나오고, 이제 무주까지 이런 길이 계속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 그토록 험난했던 대여정도 여기 임도에 들어서며 끝난 줄 알았는데, 1km(?) 정도의 임도가 끝나며 길은 다시 좁은 산길로 이어진다.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어두어서 더욱 희미한 길을 또 한참 걸은 다음에야 산은 팽팽했던 꼬리를 슬며시 내리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내리막길이 펼쳐지며 고도가 낮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낮춰지는 고도 속에 가까이 다가오는 무주 시내의 불빛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 도착해 2km 정도 포장도로를 걸어 우리는 마침내 남대천이 흐르는 무주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후 9시 40분 무렵이었다. 우리는 마침내 정확히 48.1km에 이르는 덕유산 대종주를 무박으로 해낸 것이다.
|
|
|
|
ㅊㅈㅅ (2021-06-28 18:18:06)
![]()
짝짝짝~~~~~
잠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이 정독했습니다.
상황마다 느낌을 어찌 다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해봐야만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겠지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선배님이야 연세를 초월한 초인이지만
아드님도 참 대단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탁배기 한 사발이라도
두 분께 대접하고 싶습니다.
귀한 체험 들려주셔서 깊이 감사 드립니다.
무더위와 코로나 혼돈 속에서도 건강 유지 잘 하시구여~
| 
|
|
|
|
이정범 (2021-06-28 19:04:26)
![]()
ㅊㅈㅅ님! 그저 고맙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
|
|
|
|
|
|
[1]..[461][462][463][464][465][466][467] 468 [469][470]..[5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