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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변방 도시 호탄에서 길을 잃다
이정범  2019-06-13 15:01:39, H : 4,051, V : 174


              호탄(또는 허텐, 和田)에서 길을 잃다

9년 전의 일이다. 그 때 나는 실크로드 (타클라마칸)사막남로를 여행 중이었다. 실크로드만 치자면 천산북로, 천산 남로에 이어 세 번째 여행이었다. 마라톤을 시작한지 막 10년을 넘겼을 때라 아무리 여행 중이라도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에 있을 때 역시, 이른 아침이나 저녁시간에 틈만 있으면 한 시간 가량 조깅을 했다. 물론 숙소 주변이다.

외국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은 확실히 색다른 맛이 있었다. 대개 숙소가 도심이라 시내 도로나 인도를 달리게 되는데. 중국의 변방 도시 같은 경우는 인도가 워낙 넓어 어느 시간에 달려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은 중국에도 마라톤 붐이 일고 있다 하나 그때 만해도 중국 어느 곳을 달려도 아침에 조깅을 하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중국의 서쪽 끝에 있는 신강성 중에서도 서쪽 끝 도시라 할 수 있는 카스를 아침 일찍 출발, 파미르고원에 있는 카라클호(喀拉庫勒湖. 파미르고원 해발 3,600m(?)에 위치)를 들려 20시간 가까이 사막남로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호탄(또는 허텐, 和田)에 도착한 것은 날짜를 넘겨 다음날 새벽 두 시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때만 해도 그 길은 비포장 구간이 많고, 포장된 도로라 하더라도 노면이 고르지 않아 버스가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때문에 카스에서 카라클호를 왕복하는 거리와 카스에서 호탄까지의 거리를 다 합쳐보았자 1,000km남짓밖에 되지 않는데도 그토록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아무튼 하루하루가 버스로 장시간 장거리를 달리며 여행하는 강행군이었다. 일행 대부분은 녹초가 되어 호탄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잠자리로 직행했지만, 그래도 나는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늦은 저녁식사를 호텔식당에서 하고 잠을 청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마라톤으로 다져진 체력 때문인 것 같았다.

늦게 도착했다고 해서 다음날(당일) 일정이 순연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전에 계획된 여행일정에 따라 오전 10시에는 다시 호텔을 출발해야 되기 때문에 아침에 달리기를 하려면 잠을 최대한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당일 저녁시간에는 도저히 틈을 낼 수 없기 때문에….

3시간여밖에 잠을 자지 못하고 오전 6시 20분에 기상하여 호텔을 나섰다. 그 당시 그곳은 한국보다 해가 늦게 지고 아침 해는 늦게 뜨는 편이었지만, 밖은 훤했다. 기억하건데 그 곳 도시는 외곽 쪽으로 저층 아파트단지- 5층 정도-와 아파트단지 사이사이에 도로가 거의 바둑판처럼 건설되어 있어서. 길이 미로처럼 복잡하지 않아 달리는데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비교적 직선에 가까운 길을 30분 정도 천천히 여유 있게 달려갔다가 가던 길로 돌아올 참이었다. 달리며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하지 않고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내 앞에 펼쳐진 길을 따라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30분가량 달려가다가 다시 스쳐지나가던 풍경을 떠올리며 몇 개의 교차로를 건너 숙소를 향해 돌아오는데 도착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호텔은 보이지 않고 생소한 풍경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아차’ 싶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확 몰려왔다. 반환점을 향해 갈 때는 도로에 차들도 뜸하고 인도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달리기 시작한지 한 시간이 넘자 호탄 시민들의 출근과 등교 시간이라 거리는 사람들이 서서히 붐비기 시작했다.

달리는 걸음을 멈추고 마침 도로변 가까이에 서있는 택시가 보이기에 다가가 기사한테 영어를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종이와 필기도구를 달라하여 내가 지난밤에 묵었던 호텔이름을 한자로 기억나는 대로 대충 적어서 보여주었는데. 호텔에 들어갈 때 얼핏 본 간판이름에는 博자와 理자와 塔자가 들어 있는 것 같고. 호텔은 飯店이라고 본 것 같아 대충 ‘博理塔飯店’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기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었다. 모른다는 캄캄한 신호였다. 내가 안절부절 못하니 나의 다급한 사정을 눈치 채고 기사는 택시 문을 열고 나와 출근하는 위구르족 젊은 아가씨를 붙잡고 내가 적어준 메모를 보여주며 혹시 아느냐고 물어보았는데, 그녀 역시 한참 들여다보아도 잘 모르는 것 같은 눈치였다.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시간이 흐를수록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빨리 호텔에 도착하여 대충 씻고 식사하고 짐 정리하여 정해진 시간 오전 10시에 일행과 함께 출발하여야하는데 하는 생각으로…. 내가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으면 내 룸메이트는 물론 일행들에게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비상이 걸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므로….

그렇게 또 10여분 가까이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을까. 운전기사가 젊은 여자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돌연 나를 향해 쳐다보며 “무스타거?”하며 묻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번개같이 스치는 것이 있었다. 중국 조선족 현지 가이드가 파미르 고원 해발 3600m(?)에 위치한 카라클 호수에 갔을 때 그 앞에 있는 설산을 가리키며 무스타거 봉(해발 7,546m)이라고 소개한 말이 얼핏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내가 지난밤에 잔 호텔도 분명히 무스타거일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왜냐하면 내가 메모해준 몇 개의 한자를 보며 그들이 유추해낸 이름이기 때문에….

나는 운전기사에게 OK 사인을 보낸 다음 고개를 숙여 위구르족 젊은 여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택시에 탑승해 무스타거 호텔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반 바퀴 정도(?) 도니 마침내 지난밤을 보낸 호텔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호텔을 지척에 두고 헤맨 꼴이었다.

호텔 앞에서 내리자마자 쏜살같이 숙소로 올라가 택시비를 갖고 내려와 지불하고 호텔 간판을 자세히 보니 ‘慕士塔格大酒店’이었다. 무스타거는 타지크어로 ‘빙산의 아버지’란 뜻이고 그를 중국어로 표기한 것이 ‘慕士塔格’인 것이다. 중국에서 大酒店은 호텔을 말하는 것이니 慕士塔格大酒店은 결국 무스타거 호텔인 셈이다.

내가 위구르족 운전기사와 젊은 아가씨에게 보여준 메모 글자 중 ‘塔’자 하나만 가지고 그들은 무스타거란 호텔이름을 유추해낸 것이니 얼마나 놀라운 상상력인가. 사실 놀라운 것은 그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무스타거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내가 지난밤에 머물렀던 호텔이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직감한 나에게도 있었다.

단지 가이드로부터 그냥 몇 천리 밖에 멀리 떨어져있는 카라클호 앞에 있는 설산의 이름이 무스타거란 것을 들은 사실밖에 없는데, 왜 내가 무심코 한밤중에 급히 들어갔다가 서둘러 아침에 나온 호텔이름을 운전기사의 단 한마디에 무스타거라 단정지울 수 있었을까. 호탄이란 도시에는 호텔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이고, 무스타거란 호텔 이름은 호탄이 아닌 중국 땅 그 어느 곳에도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직감이나 영감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직감이나 영감은 모르긴 해도 그 전날 오전 일찍 카라클호에서 바라본 무스타거 봉이 나의 내면에 잠복해 있다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섬광같이 빠른 속도로 내 상상력을 움직여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곳 호탄에는 호텔 외에 다른 업종의 상가 건물에도 무스타거(慕士塔格)란 간판이 여러 곳 걸려 있었다. 무스타거는 한국의 백두산만큼이나 그 곳 중국 사람들에게는 엄청 유명한 산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훈련이나 대회에서 산을 달리다가 길을 잃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필드에서 국내이건 해외이건 달리다가 길을 잃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엇에 홀린 듯이 길을 잃었다가 마법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 내 숙소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해외에 나가 달릴 때는 길을 잃을 것을 대비하여 반듯이 숙소 이름을 정확히 알고 택시비 정도는 꼭 지참한다.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중국 변방의 도시에서 길을 잃으며 하마터면 같이 여행을 하던 사람들에게 큰 민폐를 끼칠 번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주 큰 곤욕을 치를 뻔 했다. 비싼 수업료도 지불하지 않고 아주 귀중한 경험을 한 셈이다.





달림이
 (2019-06-17 11:53:50)

여행기겸 수필같은 글 잘읽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중국출장 가면 꼭 마라톤화를 챙겨갔고
숙소에 도착하면 창밖의 인프라부터 살펴보고 다음날 뛰러갈 곳을 정하곤 했지요.
다행히 저는 그런 경우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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