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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유산 대종주 1편-아들과 대종주를 같이 하기까지
이정범  2021-06-14 09:48:39, H : 3,837, V : 191


                        아들과 덕유산 대종주를 같이 하기까지

사는 것은 우연의 연속인 것 같다. 내 순수의지나 자유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어 어디론가 갈 때가 너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을 우리는 우연이나 운명이라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번 덕유산 대종주도 우연의 힘, 운명의 입김이 작용하여 이루어진 것 같다.

아주 오래전부터 산을 좋아하고, 산이 좋아서 10년 이상을 홀로 한반도 남쪽의 높은 산들을 등정하고, 20년 이상 마라톤을 해오면서도 봄부터 가을까지는 자주 산에서 짐승처럼 달려왔지만 내가 나이 칠십이 되어 다시 덕유산 주 능선에 설 줄은 몰랐다.

이번 덕유산 대종주는 순전히 아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아들은 초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산을 다람쥐처럼 잘 타기는 했으나, 중학생이 된 이후에는 산에서 멀어졌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니면 무슨 신의 계시(?)가 있었는지 작년 11월 말부터 산과 부쩍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주변 가까이에도 청량산에서 불곡산으로 이어지는 긴 산줄기, 대모산에서 구룡산 청계산 백운산 광교산으로 이어지는 큰 산줄기도 있지만, 아들은 그런 낮은 산들은 성에 안 차는지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해발 천 미터 이상의 높은 산부터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다. 주말이면 집에 붙어 있지 않고 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금요일 밤늦게 서울을 출발 다음 날인 토요일 30km 이상의 장거리 산행하고도 다시 다음날인 일요일에 당일치기 원거리 산행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아침에 집을 출발 단 하루에, 그것도 해가 중천에 있는 대낮에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독립되어있는 해발 1천미터가 넘는 두 개의 산을 연거푸 오르고 저녁에 귀가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어찌 보면 아들의 본격적인 등산은 내가 등산을 시작할 때와 그 패턴이 너무 유사하다. 나도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산부터 오르기 시작했고, 한 번 원거리 산행을 가면 그 산을 최대한 광범위하게 경험하기 위해 산행 코스를 최대한 길게 잡았다. 올라간 코스로 내려온 적이 없었고, 항상 그 산의 등뼈인 주능선을 타고 가다가 다른 코스로 하산하였다.

그런데 아들과 나의 차이점은 나는 30대가 끝나가는 무렵에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지만, 아들은 30대 초반이 끝나가는 무렵에 시작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대개 한 달에 평균 두 번 정도 원거리 산행을 했는데 아들은 매주 그것도 이틀 연속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등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가 나 같은 경우는 이미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낳아 키우는 가장의 위치에 있을 때였고 아들은 미혼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들은 등산을 시작하는 자세도 나와 사뭇 달랐다. 등산복, 등산 배낭, 등산화 같은 기본적인 것은 물론 여타 등산에 필요한 장비를 계절이나 등산로의 상태에 맞춰 미리 골고루 다양하게 갖춰놓고 등산을 시작했다. 나보다 훨씬 치밀하고 철저하다. 나는 지리산 첫 산행을 할 때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배낭도 등산 배낭이 아닌 끈이 가느다란 신발주머니 같은 배낭(리꾸사꾸)에 크림빵 두 개에 물 한 병 달랑 넣고 지리산 백무동에서 천황봉에 올라 그 험한 칠선계곡으로 내려왔다. 그때 기진맥진할 정도로 너무 고생하여 그 이후에 고산 등정에 필요한 등산복이나 등산 배낭이나 등산화나 장비를 하나하나 장만해 나갔다.

그런 철저한 준비로 아들은 반년 만에 50개가 넘는 한반도 남쪽의 높고 큰 산을 등정했고, 산꾼들 사이에 회자되는 무박 3대 대종주 중에 지리산 화대 종주와 설악 대종주는 5월에 끝내놓고 마지막으로 덕유산 대종주만 남겨 둔 터였다. 지금 이대로의 추세로 나간다면 등산을 시작한 지 1년 도 안 되어 대한민국 100대 명산을 오르고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산도 다 등정할 것 같다. 내가 대한민국 산에서 10년 동안 이룬 결과를 아들은 1년 안에 다 이룰 것 같다.

다만 내가 아들보다 산행경험에 있어서 풍부한 것이 있다면, 나는 달랑 등산 안내도만 가지고 홀로 전국의 산을 찾아다녔지만, 아들은 산행이야 거의 혼자 이루어진다 해도 수도권인 집에서 등산할 산까지의 이동은 산악회 같은 단체 버스를 이용하고, 산행에 었어서도 GPS같은 편리한 수단에 대부분 의존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끊긴 등산로에선 길을 읽는 능력이 내가 아들보다 조금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들이 덕유산 대종주에 나를 초대하게 된 것도 십중팔구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끊긴 설천봉 이후 비법정 탐방로에서 나의 그간 산행경험이 자기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아들은 덕유산 대종주를 함에 있어 내가 필요해서 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니 이번 덕유산 대종주가 꼭 우연이라고만 볼 수도 없을 것 같다. 아들이 산을 잘 탈 수 밖에 없는 것은 나를 닮은 유전적인 요인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고, 무엇보다 아들이 산을 좋아하게 된 것도 지금까지 살아오며 산에서 걷고 달리는 나를 오랜 시간 가까이서 지켜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덕유산은 내가 40대에, 한 번은 홀로 또 한번은 아내와 함께 왔던 곳이다. 첫 번째 홀로 산행을 할 때는 구천동에서 시작하여 향적봉을 올라 주능선을 타고 가다가 월성치에 폭우를 만나 더 이상 남덕유산 쪽으로 진행할 수 없어 중도 이탈하여 황점 마을로 급히 하산하였고, 두 번째 산악회를 따라 아내와 왔을 때는 영각사에서 출발하여 남덕유와 향적봉을 거쳐 무주 구천동으로 무사히 하산하였다.

매년 6월만 되면 아내와 함께 덕유산 주능선을 걸으며 활짝 핀 온갖 야생화에 탄성을 지르던 그 때를 회상했으니 이번 덕유산 대종주에 아들과 함께 나서게 된 것도 꼭 아들의 부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다시 덕유산에 오르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이 이미 무의식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내 무의식적 욕망을 아들의 같이 가자는 한 마디가 내 의식 밖으로 끄집어낸 것일 수도 있다.

이번 덕유산 대종주 산행은 겉으로 보면 우연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우연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내 지나온 생애가 덕유산 대종주를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그렇게 지금까지 흘러온 것 같다. 덕유산 대종주를 계기로 마음을 일신하여 새롭게 70대를 시작하라는 운명의 계시였던 것 같다,

어쩌면 세상에 우연은 없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당도해 있는 이 세상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내 삶, 이 지구의 역사, 이 우주의 역사 속에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고로 “필요는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EH 카의 말은 매우 설득력있게 들린다. 나를 움직이는 힘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면 이번 덕유산 대종주도 스쳐 지나가는 일회성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의 내 생애를 매듭짓고 앞으로 새롭게 전진하여 미래의 나를 보다 역동적으로 펼쳐나가는 데 있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큰  변곡점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50대아줌
 (2021-06-16 19:09:47)

덕유산 대종주 산행을 아드님과 시작하셨나봅니다.
저도 금년에 덕유산(남한에서 4번째로 높은 산이더군요)을 등산하고 싶습니다.
두 분의 무사등정을 기원합니다.
다음 산행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이정범
 (2021-06-16 19:52:03)

지난 6월 5일에 덕유산 대종주를 이미 마쳤고
이 글은 그 산행의 두 번째 후기입니다.^^

제 산행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세 번째 후기 곧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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