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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정범	2022-12-12 06:49:13, H : 4,638, V : 67

  좋은 나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1
청춘만 좋은 나이는 아닐 것이다
몸은 좀 늙었어도 마음이 아직 시퍼런 청춘이라면
그 또한 좋은 나이일 것이다

나이는 좀 들었어도
몸이 젊은 사람 못지않게 건강하고
지적인 활동까지 왕성하다면
노인이 청춘보다 더 좋은 나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이 막막하고 불안하던 청춘보다는
지금의 안정된 내가 훨씬 좋다

밥벌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밥벌이를 위해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고
밥벌이를 위해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고
내 앞에 놓여진 여생이 온통 자유의 시간이니

그토록 젊은 시절에 꿈꾸던
자유의 시간이 내 앞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으니
여기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내가 쓰고 싶은 시 마음대로 쓰고
내가 하고 싶은 달리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내가 읽고 싶은 책 마음대로 읽고
내가 듣고 싶은 음악 마음대로 듣고
내가 보고 싶은 영화 마음대로 보고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렇게 하고 싶은 일 아직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으니
여기서 더 이상 그 무엇을 바라겠는가

   2
한 30년 전쯤 이야기다
나이 사십 초반 무렵 한겨울에 혼자 설악산에 갔다

오색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 일찍 출발해 대청봉을 오르고
백담사 쪽으로 하산 중이었다

봉정암을 바로 코앞에 두고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데
60대로 보이는 남자 노인(?)이 홀로 맞은편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눈발이 막 날리기 시작한 때였다
인적이 끊긴 적막한 산중이었다

그 노인은 내가 몹시 반가웠던 모양이다
만나자마자 먼저 말을 건네며 몇 마디 얘기 끝에
내 나이를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나이를 말했더니
“참 좋은 나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 연세에
짧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 그 시간에
홀로 한겨울 대청봉을 오르는
노인의 체력과 용기가 부러웠는데
그 노인은 자기보다 한참 젊은 내가 홀로 산행하는 것이
기특(?)해 보였던 모양이다

   3
우리는 갈 길이 바빠 몇 마디 더 나누고 헤어졌지만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 그 공간으로 돌아간다

나는 지금
그때 그 노인보다
나이가 좀 더 들은 노인이 되었지만

그때 그 노인은 지금
살아계신지도 모르겠다
살아계시다면 구십이 훨씬 넘으셨을 터인데

나는 그때에서 한참 이후인 40대가 끝나가는 무렵에
마라톤을 시작하고 더불어 산악마라톤도 지금까지 즐기고 있으니
어쩌면 30년이나 지난 지금의 내가
30년 전의 그때 나보다 전체적으로는 체력이 떨어졌겠지만
산은 더 빠른 속도로 탈지도 모르겠다

30년 전 그 노인도 체력관리를 잘 해오셨다면
아마 나이 구십이 지난 지금도 설악산을 홀로 오르고 계실지 모르겠다
어쩌면 눈 내리는 겨울 어느 날 설악산을 가면
설악산 어디쯤에서 그 노인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 노인이 반갑게 웃으며
다시 한번 나에게 “지금도 참 좋은 나이”라고 하실까


김 (2022-12-12 08:09:47) 멋있는 글 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거구요 존경스럽습니다


평생교육 (2022-12-12 09:22:58) 어떤 사람들은 25세에 이미 죽어버리는데 장례식은 75세에 치른다 -벤저민 프랭클린- 대부분 사람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부로 끝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일찍 죽어서 꼰대 소리 들으며 몸만 살아 있는 상태라는 뜻 같습니다.


김용경 (2022-12-12 12:52:2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온 게시판도 이렇게 따뜻하고 풍부한 이야기가 많은 공간으로 거듭나길 소망해봅니다.


사랑해 (2022-12-13 09:30:33) 비록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나이먹음, 노년에 이르렀지만 시를 쓸 수 있는 좋은 뇌가 있고 영화나 책을 볼 수 있는 좋은 눈이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귀가 있고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좋은 몸이 있다면 그야말로 참 좋은 나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정범 선생님께서는 그런 눈과 귀와 뇌와 몸을 갖추기 위해서 나름 각고의 노력을 하셨기에 그 연세에도 좋은 나이의 삶을 사시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늘 건강하시고 늘 좋은 날들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이정범 (2022-12-14 13:59:32) 따듯한 칭찬과 격려의 댓글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힘을 얻어갑니다 더욱 좋은 글로 보답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더욱 애쓰고 애쓰겠습니다^^


이정범 (2022-12-30 17:10:16) 여기에도 갑장님의 댓글이 지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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