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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며 드는 잡생각
dlwdma  2014-11-25 23:53:11, H : 2,879, V : 122


다시 주로에 돌아와

내게 달리기는 무엇인가? 달리기로 인해 내 삶은 변했는가? before, after? 달리기를 그만 둔 몇 달간 마치 답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여기며 무수히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달리기와 관련해서 던질 수 있는 모든 질문들을. 의미 있는, 오로지 내게 의미 있는, 내가 목숨 걸고 덤벼들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답이 있으려니 했다. 아니, 그런 답이 있기를 갈구했다. 나만의 답, 나만의 이유를 찾아서 근사하게 포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달리기와 인류, 달림으로써 인류가 비로소 지금이 있다는 베른트 하인리히가 「우리는 왜 달리는가」에서 주장한 결론에서 한 치도 더 나가지 못했다.

내가 솔직한 탓인가, 아니면 정서가 메마른 탓인가? 어쨌건 난 생물학자들이 주장한 달리기의 근거에 항복하고 말았다. 나도 그저 유적존재로서 주어진 팔다리를 힘껏 움직일 뿐이다. 정자의 꼬리가 항해하듯 좌우를 번갈아가며 흔들고 내딛을 팔다리를 타고 났을 뿐이다.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인가? 달리기가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이라도 했단 말인가? 철학적으로 달려야하는데 생물학적으로 달려서 뭐 문제가 생긴단 말인가. 철학적으로 달리면 늦어도 용서가 되고 생물학적으로 달리면 아니란 말인가? 철학이야말로 치열함을 토양으로 하고 있지 않는가?

아니, 진즉에 답은 알고 있었다. 나는 아주 메마른 성정이니까. E 윌슨이 「지구의 정복자」에서 하인리히의 주장을 인용하며 동의를 표했을 때 난 그걸 진리로 받아들였다. 인간은 달림으로서 비로소 인간이 되었고, 악센트를 좀 추가하자면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고. Born to run! 그것이 21세기 과학의 성취라고, 인류가 이제야 알아낸 비밀이라고. 윌슨을 통해 검증되었다고. 하지만 씁쓸했다. 아무도 달리고 있지 않았다. door to door의 사회에 일정하게 거리를 둔 자들에게도 BMW는 있지만 Run은 없었다. 그것이 난 우리가 진리와 얼마나 먼 거리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고 여겼다. 어쩌면 집과 병원 침대 사이를 오가는 bed to bed 사회 직전에서 난 인류의 유산이 되어버린 달리기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다고 자조했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러나 난 달리지 않았다. 달려야할 이유가 백가지라면 달리지 않아도 될 이유도 백가지 있었다. 이쪽이 열 개면 저 쪽도 열 개고 이쪽이 천 개면 저 쪽도 천 개다. 난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쪽이 먼저 끓어 넘치는가를. 달리지 않으면서, 달리고자 하는 욕망이 날 압도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하루가 열흘이 되고 열흘이 백일이 되고 백일이 이백일이 되었다. 일상이 나를 속이고 있었고, 속아버린 나는 편안할 수 있었다. 질문은 공허했고 승부는 지연됐다. 일상이 아닌 달리기는, 유적 존재 자체였던 달리기가 유희와 몸단장으로 변해버린 지금, 난 그 책임을 어디에도 물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 평온한 시간을 침략한 사건은 한 번 밖에 없었다.

9월 어느 토요일이었다. 일을 마친 동료들이 이끄는 대로 축구장으로 향했다. 지독한 스콜성 강우가 때리고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맨발로 공을 찼다. 축구도 부담스러웠지만 맨발이라는 상황에 난 공포를 느꼈다. 맨발로 공을 찬다는 것?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트랙이 보였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여기도 운동장 트랙이 있구나! 트랙을 달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들이 축구를 마칠 때까지 달려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어마어마한 폭우. 그날은 우기 중에서도 가장 오래 폭우가 계속된 날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에겐 축구화가 없었다. 그들의 신발은 5백원짜리 쪼리라 불리는 샌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시월의 강원도 산 속에서는 도무지 달리려는 결기를 세울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스러져가는 기운, 바람에 저항할 수 없었다. 달리기가 삶의 방편이 아니고, 삶이 계절과 무관하게 조직된 지금, 홀로 그 경계를 오가는 것이 힘들어서, 난, 말라가는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며 허공만 바라봤다. 윤기를 잃어가는 내 손,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 건조한 마찰의 지점을 억새를 지나온 바람이 휘감고 갔을 뿐이다. 가을은 그랬다. 중마를 앞 둔 바로 며칠 전까지. 뛰어야하는데 뛸 수 없었다. 지난 봄, 차라리 뛰는 것을 그만 둔 것이 위안이었던, 그저 숨만 쉬고 산다는 것이 면죄부였던 것처럼, 가을에도 뛸 수 없었다. 스러져갈 땐 같이 풀어헤치고 슬픈 시늉을 하며 뒷모습을 보이는 것이 도리라 여겼다.

ytn 손기정 평화마라톤

참 어렵다. ytn, 손기정, 평화 사이의 함수, 서열, 위계는 읽기 어렵다. 네이밍을 둘러싼 권력의 구조, 하나의 마라톤대회를 여는 이해집단의 갈등봉합과정이 담긴 긴 이름의 대회다. 순서에 따라 ytn〉손기정재단의 부등식이 성립한다면 그냥 ytn마라톤이다. 그래도 손기정마라톤 또는 평화마라톤으로 불러도 된다면, 일본기업의 로고가 가슴에 박힌 기념품을 나누어주는 것은 민망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 그냥 ytn마라톤이다. 어쨌건 그날 난 그 자리, 풀코스 대기선에 있었다. 대기선의 연령분포도를 그린다면 50대가 최빈값일 것이다. 중간값도 어쩌면. 그러니 난 정중앙에 위치한, 마땅히 있어야할 자리에 있는 셈이다. 점점 할 일없는 노인네들의 자기만족놀이로 전락해가고 있는 풀코스마라톤의 현주소는,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삶의 양식을 강요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듯해서 씁쓸하기만 하다.

출발이다. 폭죽이 남긴 매캐한 화약냄새를 맡으며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익숙한 한강 강변길. 강가의 버드나무는 아직 푸른 잎을 달고 있고 차도변의 느티나무, 플라타너스의 잎들은 바람이 거두어갔다. 가장 먼저 물이 오르는 나무는 역시 늦도록 물을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의 나무들은, 풀들은 그저 기온에 따라 갈아입는 패션에 불과하다. 사람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 언제나 달릴 수 있는 주로가 있는 곳, 계절의 변화에 몸이 동요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그래서 도시는 역설적으로 자유고,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인간적이다. 비타민D 결핍이 가져오는 우울증을 1050원 소주 한 병으로 교환, 소비해버릴 수 있다면 말이다.

5분 15초/km. 그렇게만 달리기를 원했다. 되도록 천천히 페이스를 잡고자했지만 관성은 이를 거부했다. 5분 7초, 5분 2초, 5분...낭패다. 속도를 늦추려고 하지만 되지 않는다. 그간의 경험으로부터 냉정하게 추정한 완주 예상시간은 3시간 45분이다. 그러려면 페이스를 늦춰야한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관성의 법칙이 지배한다. 늦추려하지만 늦춰지지 않는 관성을 느끼며 어쩌면 내가 이 속도로 계속 완주할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경험은 그 가능성을 부정한다. 마라톤에서 희망과 의지는 서푼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사무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뇌는 실패를 반복하는가 하면 관성을 통제할 능력도 갖지 못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 왜 이성은 뇌의 컨트롤 타워에 있지 않나? 좁은 인간관계에 갇혀 반복되는 일상의 패턴에 안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더 나은 진화의 전략이었다면, 어쩌면 이성은 단지 계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일이다. 합리적인 선택 보다 실패를 반복하는 패턴 선택, 그것이 이미 나의 마라톤완주 패턴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뇌는 나이들수록 더 완고해지니까.

잘못 되었음을 알고도 고치지 못하는 이 완고함, 관성은 나만의 어리석음은 아닐 것이다. 가장 원시적인 동작을 무한반복하는 이 단순한 게임에 수많은 러너들이 연습에 연습을 거치고서도 주저앉고 걸어가며 마무리를 하지 않는가. 기권과 다를 바 없는. 완주시간과 관계없이 내가 받은 메달의 절반은 반납했어야 옳았다. 나도 한 때 마라톤을 했다는, 그것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 양 술자리에서 사람들 기죽이는 무용담을 늘어놓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래도 그냥 달린다. 대회도 실패가 용인되는 연습의 일환이니까. 우울증 치료제 또는 주말나들이 정도, 혹은 마땅히 반겨주는 이 없는 늙은이의 취미생활이니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겠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또 달린다. 저기 앞에 흔들리는 풍선은 330페메일 터. 왜 이렇게까지 왔는지, 확실히 낭패로다. 하지만 몸은 예상외로 가볍다. 단 2주간의 연습으로 많이 올라온 느낌이다. 나름 속도를 늦춘다고 하는데도 5분페이스를 유지하는 걸 보면 나쁘지 않다. 어쩌면 330을 할지도 모른다는 로또 같은 생각을 한다. 역시 사람은 확률보다는 도박에 더 어울리는 존재다.

기숙하는 공간을 빠져나오며 오늘은 좀 다른 달리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화성이 아닌 대위법적인 달리기. 하지만 그게 불가능함을 채 5km도 달리지 않고 깨달았다. 오로지 직선만이 존재하는 2차원의 세계, 시선도 전방 ±15°이상을 돌리기 어려운 조건, 귀도 나의 호흡과 발걸음 소리에 지배당해 바로 옆 사람의 호흡소리마저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태. 단지 목표물을 향해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사냥꾼, 뒤에 오던 동료들이 다쳐 넘어져도 모른 채 앞으로 달려가는 관성에 지배당하는 사냥기계, 오래달리기 능력이 생태계에서 인간의 지위를 끌어올렸다면, 인간에 의해서 자행되는 학살과 그를 가능케하는 맹목성도 달리기로 인해 파생한 것은 아닐까하는. 도무지 독립적인 사건들이 병행해가며 나타나고 사라지는 질서와 조화는 불가능할 것 같은 심리상태와 닫힌 오감. 그런 일차원의 존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강동대교 방향으로 하염없이 전진하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앞으로만 앞으로만. 돌아보면 소금기둥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래 가자, 나도 가자. 저들이 간 길을 따라서, 그러나 저들과는 조금은 다른, 달리기를 통해  또 다른 무엇도 생성시키지 않으며 단지 처분할 곳을 찾지 못한 시간과 에너지를 뿌릴 곳을 찾아온 자의 본분에 충실하며, 가자. 언제나 변함없이 실패의 길을, 패배자의 길을 성큼성큼 내딛으며 가자. 한평생 루저의 길을 꿋꿋하게 간다면 그 또한 가치 있지 않겠는가? 그 또한 실패하기를 바라지만. 제어되지 않는 이 달리기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자. 그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는 소비, 소모를 예찬하는 에로티즘에 취해서 달리자. 몸은 가볍다. 이제 마음도 가볍다. 벌써 선두가 1차반환점을 돌아서 온다. (전반부 끝- 내일부터 알바를 하는 관계로 후반부를 쓸 기약은 할 수 없음)









이정범
 (2014-11-26 08:20:28)

이 마온에서 모처럼 좋은 글을 읽는군요.^^ 저역시 YTN 손기정배 마라톤 하프를 달렸는데, 님과 같이 생각 깊은 분과 함께 달렸다는 사실에 오늘은 더욱 행복감을 느낍니다.


같은날
 (2014-11-26 08:57:07)

풀 달렸습니다.
몸이 안좋와서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계신 옛날 글도 생각이 납니다.
그때도 참 좋은글이다 하는 느낌 이었는데.. 모처럼 대회 후기를 읽게 되고 후반부도 기대감을 갇게 해준 듯 싶습니다.건강 잘 챙기세요!


주자
 (2014-11-26 09:10:02)

기껏해봤자 그저 달리기에 지나지 않는 것...
그 달리기가 성공적이지 못 했을 때, 자신과 또
가족이 배를 주려야 하는 절박한 사냥꾼이 아닌
바에야 차라리 그 순간이나마 모든 번뇌들에서
달아나려는 그런 본능이라 해도 좋을 내 달리기.


달림이
 (2014-11-26 12:17:33)

부럽네요.. 알면서도 저지를 수 있는 그 무모함이


ㅎㅎㅎ
 (2014-11-26 13:30:43)

글을 다 이해할수는 없으나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후기 기다려봅니다.


비만런녀
 (2014-11-26 13:43:51)

저도 YTN손기정마라톤을 좋아합니다만, 금년에는 수시논술보는 아이에게 부모노릇이 필요할 것 같아 포기했는데, 아쉽네요.
잡생각이 단지 잡생각에 거치지않고 굉장히 철학적인 깨달음(깨달은 것 없다는 듯이 말씀하시지만)을 담보하는 생각을 하시며 주로에 계신다고 하니 같이 달렸더라면 더 좋았을 걸싶습니다.

원글님같은 분이 같은 주자라는 것도 제게는 달리기의 한 이유가 됩니다.
언제나 화이팅!!!


사랑고픔
 (2014-11-26 14:18:00)

좋은글 후반부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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