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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편 무인지경을 무념무상으로 걷다
이정범  2024-06-17 08:24:43, H : 904, V : 4


  제6편 무인지경을 무념무상으로 걷다

   1
고치령에서 다음 큰 고개인 마구령까지는 8km
여전히 늦은맥이재에서 고치령 구간처럼
길 양쪽으로 수목이 우거진 초록 숲의 터널이다
기온이 제법 올랐을 시간인데도 더위를 느끼지 못하겠다
능선 양쪽 아래로 장엄하게 초록 치마가 드리어져 있을 터인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고치령에서 마구령까지의 구간에는 1,096봉이 솟아 있기 때문인지
늦은맥이재에서 고치령 구간보다는 상당한 업 다운과 함께 중간중간 돌길도 있다
그래서 걷는 속도가 조금씩 떨어지면서도 체력소모는 더욱 커진다
종주 산행 후반으로 갈수록 다리 근육에 피로가 쌓이다 보니
경사가 급한 긴 오르막길은 점점 힘에 붙인다
해발 200m 안팎의 봉우리 하나를 치고 올라가는데도
온몸의 힘을 집중시키며 안간힘을 다해야 한다

이 고치령에서 마구령까지 8km의 길을 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었다
이 구간 역시 늦은맥이재에서 고치령 구간처럼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연속되는 길고 긴 긴 무인지경을 무념무상으로 걷고 있다

드디어 종주 산행의 마지막 큰 고개 마구령에 내려섰다
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다리는 것은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아니고
고갯마루에 온통 묘목이 심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종주 산행을 끝내고 집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최근에 이 고개 밑에 새로운 터널 길이 개통되며
기존의 도로는 폐쇄되고 자연으로의 복원작업을 위해 묘목을 심었다는 것이다

이 마구령은 소백산 가장 동쪽에 자리한 고개로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암곡리를 이어주고 있는데
옛날에는 장사꾼들이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해서
마구령馬驅嶺이라 불렸다고 한다

옛날에 이 소백산 줄기를 넘는 고개는 세 개가 있었는데
맨 서쪽에 있는 죽령은 주로 양반들이 영주와 서울을 오가는 관문 역할을 했고
줄기 중간에 있는 고치령과 동쪽에 있는 마구령은
보부상 같은 장사꾼들이나 서민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마구령에 지하터널 길이 개통되며
고갯길을 넘는 시간이 많이 단축되고
더불어 고개 북쪽 주민들이 영주 시내에 볼일 보러 가는 길이
훨씬 편해졌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지만
이 백두대간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쉬어갈 수 있는 길 하나가 없어진 것이니
좀 섭섭한 일일 수도 있겠다

   2
마구령에서 쉬며 2차로 제대로 된 행동식을 먹는다
남은 떡 한 팩을 마저 비운다
앞으로 남은 구간은 9km 정도
이제 남은 행동식은 물 600ml 정도와 에너지젤 두 개밖에 없다

마구령에서 드디어 산악인 한 명을 만났다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다
고치령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갈곶산에서 백두대간 길을 따라
늦은목이재쪽으로 하산한다고 한다
혼자 산행하며 사색하는 시간을 즐긴다고 한다

마구령은 해발 높이가 820m
마구령에서 갈곶산 사이에는 해발 1,060봉이 있다
불과 고도를 240m 높이는데도 산행 초반에 500m 정도를 높이는 것 이상으로
힘에 부친다

길도 계속 양쪽으로 수목이 빽빽이 들어서 있지만
조금씩 거칠어진다
돌들이 깔린 구간이 점점 많아지고
업 다운도 점점 심해진다
마구령에서 만난 산꾼은  
마구령에서 시작된 길고 가파른 비탈길에서
나와 아들의 페이스에 맞추지 못하고 초반에 뒤로 처진다

마구령에서 갈곶산까지 거리는 4.9km에 불과하지만
내 몸이 느끼는 그 거리감은
고치령에서 마구령까지 8km 만큼이나 지루하게 느껴진다
체력이 점점 바닥 가까이 줄어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구간에는
지금까지 지나온 길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멧돼지 똥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멧돼지들의 영역 표시인 것 같다
내 땅을 침범하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경고 표시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멧돼지는 숨어서 지켜보고만 있었는지
단 한 마리도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고
움직이는 기척도 없었다

멧돼지 똥이 신길에 널려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발길이 뜸하다는 것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곳 멧돼지들도 갑작스런 인간의 출현에
몹시 놀라 잔뜩 긴장한 채 나와 아들의 산행을 숨죽이며 지켜봤을 것이다

   3
아들은 1,060봉에 올라섰을 때
쉬어가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물었지만
계속 가자고 하였다
앉아 쉬면 일어나기 싫을 것 같아서

약간의 비탈길만 걸어도 점점 힘이 드니
이제는 길 양옆에 도열한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길밖에 없었다

시시각각 쉴 사이 없이 내 앞에 다가오는 길은
내가 물리쳐야 할 적이기도 했다
내 앞에 나타나는 길을 내 두 발로 박차며 뒤로 밀어내야
앞에 남은 길을 줄이며 앞으로 전진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물리칠 적이 없어야
더 이상 힘들게 걷지 않아도 될 부석사에
내 고단한 두 발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에

1,060봉에서 내려갔다가 갈곶산을 오르며 에너지젤 하나를 먹고
힘을 내 드디어 해발 954.5m 갈곶산 정상에 섰다
마구령에서 갈곶산까지도 중간에 쉬지 않고 걸었다
길고 가파른 비탈길을 오를 때마다 갈수록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산행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견디기 어려운 곳은 없었다

왼쪽으로 약간 방향을 틀어 직진하면 백두대간 늦은목이재로 하산하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90도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가면 봉황산을 거쳐 부석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갈곶산에서 부석사까지는 아직도 4km 정도 남았다

갈곶산 정상에서 남은 에너지젤 한 개도 물과 함께 섭취하며
전열을 가다듬는다. 나는 적당히 지쳐 있는데 아들은 생생하다
아들은 오히려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나는 것 같다

갈곶산까지 오면서도 아들은 길이 헷갈리기 쉬운 갈림길마다
손수 제작한 리본을 나뭇가지에 매달며 나와 산행 페이스를 맞춰 왔다
아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비슷한 페이스로 산행을 같이 할 수 있는 구간은
희방사에서 고치령까지가 딱 맞을 것 같았다

갈곶산 정상에서도 사방팔방으로 나무들이 에워싸
나무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바로 몇 미터 앞에 부석사 방향의 등산로에
출입금지란 표시판이 마지막 고난을 예고하는 것만 같아
섬찢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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