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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편 녹색 숲의 터널을 통과하며
이정범  2024-06-13 09:08:24, H : 1,065, V : 3


  5편 녹색 숲의 터널을 통과하며

   1
늦은맥이재를 지나며 고치령까지
종주 코스에서 가장 편안한 길이 펼쳐진다
경사가 완만하고 돌도 거의 없는
전형적인 육산의 부드러운 길이다
산행로 양쪽에 나무밖에 보이지 않는 숲길이다
강렬한 자외선 차단을 위해 모자에 착용할 수 있는
햇빛 가리개를 가지고 왔는데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트레일 런닝 대회라면 중간에 한 번도 걷지 않고
계속 속도를 내어 달릴 수 있는 길이다

그래도 종주 산행 후반을 대비하여 체력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완만한 경사의 내리막길을 제외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헷갈리는 길도 거의 없다
어느 단체가 매년 6월 죽구 종주(죽령-고치령)산악마라톤 대회를 개최하는 이유를
걸어 보니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죽령에서 연화봉을 거쳐 비로봉에 오르는 길도 비교적 완만한 편으로
내가 지금까지 참가한 산악마라톤 대회 코스 중에서 가장 환상적인 능선길일 것 같다
단지 늦은맥이재에서 고치령가지 9km의 구간에서
능선 아래 양쪽으로 펼쳐지는 소백산 자락을 조망할 수 없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이토록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한여름에도 걷기 좋을 만큼 훌륭한 푸른 숲의 터널임에도 불구하고
9km의 길을 걷는 동안 단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이날만큼은 나와 아들 둘이서 늦은맥이재에서 고치령까지 9km 구간을
통째로 전세낸 것 같았다
오전 8시쯤 고치령에 내려선다

   2
소백산 희부 종주 코스에는
산 남쪽 마을과 북쪽 마을을 이어주는 두 개의 큰 고개가 있다
하나는 지금 당도한 고치령 고개고
또 하나는 고치령에서 9km 동쪽에 위치한 마구령이다
이 두 개의 고개는 종주 산행 중 무슨 일이 생기면
비교적 쉽게 하산할 수 있는 탈출로로 사용되기도 한다
두 고개 다 차들이 다닐 수 있는 도로이기 때문이다
이 고치령 고개는 언제인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싹 포장되었다

고치령에 내려서면 길 바로 건너에 산령각山靈閣 한 채가 보인다
옛날에는 성황당이라 부르기도 하고 山神閣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산신령을 모신 집이기 때문이다

이 산령각에는 두 분의 산신령이 모셔져 있다
한 분은 소백산 산신령, 또 한 분은 태백산 산신령이다
여기에는 단종과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의 한이 서린 곳이다
단종은 소백산 북쪽 영월 청령포에
금성대군은 소백산 남쪽 영주 순흥에 각각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원통하게 죽었다
단종은 죽어서 소백산 산신령이 되었고
금성대군은 죽어서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 한다
그러니까 고치령의 산령각은 단종과 금성대군을
위로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3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이 고치령을 경계로 하여
소백산 국립공원 서쪽은 소백산으로 동쪽은 태백산으로 나누어 불리고 있다
소백산과 태백산으로 나뉘어 불리는 것은 그 역사가 꽤 오래 된 것 같다
고려 때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도 태백산 부석사라 적혀 있고
오늘 종주 산행의 종착 지점인 부석사 일주문에도 버젓이
태백산 부석사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 걸 보면
더구나 부석사 바로 뒷산이 봉황산임에도 불구하고

왜 고치령 서쪽 산세가 훨씬 웅장하고 최고봉인 해발 1,439m 비로봉이 있는
산줄기를 작을 소자가 들어간 小白山이라 부르고
고치령 동쪽 산세가 덜 웅장하고 높이도 해발 천 미터를 겨우 오르내리는
산줄기를 클 태자가 붙은 太白山이라 하였는지

참고로 한 30년 전 지리산 북쪽인
전북 인월에서 만난 어느 연세 지긋한 할머니는
지리산 동쪽에 있는 지리산 최고봉 해발 1,915m 천왕봉을 큰 지리산이라 부르고
지리산 서쪽에서 제일 높고 지리산 전체로도 두 번째로 높은
해발 1,732m 반야봉을 작은 지리산이라고 말하였다

내 짐작건대
희방사나 부석사나 다 같이
조계종 본사인 孤雲寺의 末寺임에도 불구하고
더군다나 사찰 건립 연대는 희방사가 643년으로
부석사의 676년보다 33년이나 더 빠른데도
소백산에서 그렇게 비합리적인 이름이 붙여진 것은
소백산 서쪽 끝부분에 있는 희방사보다
소백산 동쪽 끝부분에 있는 부석사란 절이 규모가 훨씬 커
그리 정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아니면 희방사보다 부석사가 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해
자존심 다툼에서 희방사가 부석사에 밀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4
고치령에 내려서자마자 고개 북쪽 샘터로 향한다
100여 미터 내려가니 서너 명의 사람이 물을 받고 있는샘터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목판(?)에 여우샘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여우가 많아
누군가 여우가 샘물을 마시고 있는 것을 봐
여우샘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샘터에 여우란 동물 이름이 붙여진 것이 좀 특이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지역 이름이 붙여지는데

아마 이 인근 지역에서는 꽤 널리 알려진 샘터인 것 같다
승용차를 몰고 오거나 지나가다가 샘물을 2리터는 족히 들어갈 수 있는
큰 병을 서너 개씩 가져와 받아가는 걸 보면
남편과 함께 물을 받으러 온 중년 부인은
나와 아들 모습을 보며 “부자가 같이 산행하는 모습이 보기에 너무 좋네요”
하고 웃으며 인사말을 건넨다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도로 한쪽에 앉아 행동식을 섭취하고
여우샘 생수로 두 병을 채운 다음 다시 고갯마루로 향한다

고치령은 해발 높이가 760m
소백산 최고봉인 비로봉이 1,439m이니 679m나 내려온 셈이다
산맥을 파도에 비유한다면 희방사에서 고치령까지는
높은 파도를 쳤다가 푹 가라앉은 형국일 것이다

고치령부터는 가라앉은 파도가 다시 서서히 고도를 높이겠지만
해발 천 미터 안팎을 오르내리며 세력을 유지하다가
갈곶산(해발 954.5m)에서 방향을 90도 틀며
봉황산(해발822m)까지 가서는 부석사를 향해 고도를 급격히 낮출 것이다

행동식을 섭취하고 여우샘 생수도 한 잔 마시니
몸에는 새로운 힘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옮기는 발걸음이 고치령에 내려설 때보다 한결 가벼워졌다








20년차
 (2024-06-13 11:03:13)

다음주에
죽고종주가는데 기대됩니다.
좋은글 많이 도움이 됩니다.
여우샘에서 물보충해야 겠네요..
감사합니다...화이팅


이정범
 (2024-06-13 16:25:03)

23일 대회에서
소백산을 마음껏 누리시고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날씨가 선선하면 금상첨화일 터인데
지금 같은 날씨 추세라면
더위에 대비하여 복장과 행동식을 준비하시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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