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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편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철쭉꽃이 피었다
이정범  2024-06-10 08:35:08, H : 988, V : 2


  4편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철쭉꽃이 피었다

   1
소백산 일출 예정 시간인 오전 5시 10분이 되도 태양은 보이지 않는다
희방사에서 출발할 때 품었던 희망 중에 하나는
비로봉에 올라가서 동쪽 산 봉우리나 능선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는 것이었다
비로봉 출발 시간을 오전 2시쯤으로 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희방사 삼거리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둥근달이 환하게 떠 있을 만큼 하늘은 청명하였다

그런데 희방사에서 사진 찍느냐고 시간을 오래 끌다 보니
소백산 일출 예정 시간에 우리는 정상인 비로봉에 설 수 없었고
비로봉을 1km 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더군다나 하늘은 곰탕처럼 뿌옇게 흐려 있어서
정상에 있다 하여도 일출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유명한 소백산 철쭉꽃은 이미 산행 전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가장 최근에 그곳을 산행한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을 보며
올해는 냉해를 입어 거의 철쭉꽃을 볼 수 없었다고 하였기에
5월 23일부터 말이 소백산 철쭉제이지 철쭉꽃 없는 철쭉제가 되어 버렸다
작년에 워낙 예쁘고 탐스럽게 많이 피었으니 한 해 쉬어 가는 것도 괜찮은 일일 것이다
꽃을 피우는 나무나 풀들에게도 사람처럼 휴식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오전 5시 30분 무렵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에 올랐다
역시 해발 높이가 있고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보니 바람은
초속 4m 정도로 제법 강하게 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쪽에서 올라왔는지 등산객이 40명쯤은 되는 것 같았다
비로봉을 기준하여 서쪽인 죽령이나 천동리나 희방사 쪽에서
올라온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연화봉 능선에 올라서며 비로봉 오는 동안
우리 앞을 이동하는 랜턴 불빛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비로봉 동쪽 단양 어의곡이나 영주 쪽 비로사나 초암사쪽에서 올라왔을 것이다
등산 거리가 희방사 쪽보다 반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고
등반 고도도 희방사 쪽보다 대부분 낮기 때문에

대한민국 어느 산에 가나
특히 지리산이나 설악산이나 덕유산이나 치악산 같은 큰 산일수록
등산객들은 대부분 정상에만 붐빈다
되도록 가장 짧은 길을 택하여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편하게 정상에 올랐다가
올라간 길로 하산하는 것이 대다수의 산행 방식이다

소백산에는 100 리에 걸친 능선이 펼쳐져 있고
그 능선에는 열 개 이상의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있지만
유독 유독 비로봉 정상에만 등산객이 많이 몰리는 이유

정상을 오르면
정상 아래 산을 다 본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 각국의 웬만한 산악인들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히말라야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필사적으로 오르려는 것도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면 세계 모든 산을 발 아래 두었으니
세계 모든 산을 오른 것이나 다름없다는
착각 속에 쉽게 빠져들기 때문이 아닐지 모르겠다

히말라야에는 해발 8천 미터가 넘는 산이 14개나 있지만
전문적인 산악인이 아니면 에베레스트를 제외한 다른 산에는
아예 오를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것과 유사한 심리적 현상일 것이다

비로봉 정상에 있는 등산객들의 복장만 봐도
대충은 그들의 산행 능력이나 내공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바람이 유독 강하게 부는 정상이라지만
5월 하순의 시원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복장은 거의 긴 팔 상의에 두툼한 바람막이 옷
발목까지 다 가린 긴 팬츠를 착용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내 기준으로는 거의 겨울 복장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일부 등산객은 춥다며 몸을 움츠리고 있다
나와 아들은 짧은 팬츠에 반팔 티에 토시만 착용하고도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는데

   2
비로봉 정상을 배경으로 인증숏을 찍느냐고
한 20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단체로 온 등산객들은
단체로 찍기도 하고
여러 명이 끼리끼리 찍기도 하고
개인 별로 하나 하나 다 찍느냐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쩌면 정상에서 사진 몇 컷 얻으려고
숨 헉헉거리며 새벽같이 힘들게 이 산을 올랐는지도 모른다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기 때문에
소백산 정상 비로봉에 선 나를 주변에 알리는데
사진만큼 효능감 있는 수단은 없기 때문에

소백산 철쭉은 예측대로 거의 피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묵시위를 하듯이
피지 않기로 작정하고 일제히 파업하듯이
완전히 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모진 찬 바람에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겨우겨우 힘들게 피운 꽃도 있었다
소백산 정상까지 어렵게 올라온 사람들이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소백산 철쭉이 피면
연화봉에서 비로봉을 거쳐 국망봉까지 장관이어야 할 터인데
철쭉을 한 송이도 피우지 못한 나무들은
하나같이 미안한 마음으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능선길 곳곳에는 철쭉꽃 외에도
내가 모르는 풀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추위에 비교적 강한 풀들이었을 것이다

   3
30년 전 늦봄에 이 소백산을 올랐을 때는
인근 마을에서 나물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후 3시 무렵이면 가마니만큼 큰 자루에 산나물을 탱탱하게 채우고
등에 짊어진 채 하산하는 수십 명의 일행이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번 산행에는 능선 주변에서 산나물을 채취하는 사람들을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었다
힘들게 산나물을 채취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살림살이가 나아져서일까
그렇다면 매우 다행한 일이다

희부 종주 코스에서 비로봉은 거리상으로 거의 5분의 1지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비로봉 정상에서 우리가 걸어온 연화 능선과 그 밑 희방사 쪽을 내려다보면 아득하다
그 아득한 거리를 다섯 번은 통과해야 목적지인 부석사에 이를 수 있다

비로봉에서 국망봉 쪽으로 고도를 낮추며
내리막길에서는 천천히 중력을 이용하여 달린다
평지와 오르막길은 숨이 차지 않는 범위 내에서 빠르게 걷는다

국망봉과 상월봉을 지나 늦은맥이재까지는 거의 30년 전에
죽구 종주(죽령-구인사)를 하며 한 번 가봤던 구간이다
늦은맥이재에서 왼쪽 신선봉 방향은 구인사로 가는 길이고
바른쪽으로 직진하면 백두대간 고치령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까 늦는맥이재 이후 코스는 나에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처녀지인 셈이다
처음 가는 곳은 어디나 나를 설레게 한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무엇이 나에게 어떤 감동을 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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