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5시 조금 지나 집을 나와
가벼운 회복 조깅을 시작해
아침 6시가 조금 지나 달리기를 마치고
청량산 기슭 대원사 바로 밑 체육공원에서
운동기구를 이용해 근력운동을 하고 있는데
말벌(왕텡이) 한 마리가 날아와 내 눈 앞을 선회한다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도
다른 곳으로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지근 거리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
신경이 쓰이고
과연 말벌의 출몰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이번에는 운동기구에서 손을 떼고는
뒷걸음질해 두 걸음 뒤로 물러나 보았다
그랬더니 말벌은
나와 떨어진 간격을 더욱 좁히며
바짝 다가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말벌은 작심하고 나를 공격 목표로 정한 것 같았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위기감과 함께
말벌이 먼저 나를 공격하기 전에
내가 먼저 기습 공격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에서 공격명령이 하달되는 즉시
내 오른쪽 손바닥은 번개 같은 속도로 말벌을 강타하였고
그와 동시에 ‘퍽’하고 말벌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6m 정도 가까이서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한 남자도
그 ‘퍽’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말벌은 나의 정확한 일격에 생을 마감하였고
그 쓰러져 있는 말벌을 보니
과거에 말벌에 쏘였던 치욕적인 두 장면이 떠올랐다
2
한 번은 군에 입대하기 전
동네 앞산에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나무를 심을 때
말벌에게 기습적으로 머리를 쏘여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수모를 당하였다
또 한 번은 십여 년 전 밤꽃 향기 바람에 휘날릴 무렵
동이 트기 전 가로등 불빛에 기대어 탄천 주로를 달릴 때
갑자기 머리에 말벌 한 마리의 습격을 받았는데
얼마나 독이 강하고 충격이 컸는지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벌에 쏘이자마자 반사적으로
쏘인 머리 부분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니
순간적으로 뭉클한 것이 느껴진 것으로 보아
말벌이 쏘고 달아나기 전에 정확하게 가격한 것 같았다
어두워서 말벌의 죽음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말벌은 내 머리를 공격한 쾌감을 잠시라도 누리기도 전에
틀림없이 내 손바닥에 응징을 당하여 으스러지며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말벌에 쏘였던 그 당시만 해도
탄천 물이 홍수로 주로에 넘쳐 발목 위까지 잠기고
불볕 더위에도 물 불 가리지 않고 달리던 때라
말벌에 쏘였음에도 당초 예정대로 달리기 훈련을 마쳤다
달리기 후
쇠망치에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옅어졌고
통증 외에는 몸에 별다른 이상 징후가 보이지 않아
별도의 약물치료 없이도 오후가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환갑 무렵에 말벌에 쏘이고도 기민하게 대응하여 공격한 말벌을 죽이고
예정된 훈련을 마친 다음 별도의 치료 없이 한나절만에 저절로 정상의 몸으로 돌아온 것
또한 그 10년 뒤쯤 말벌이 공격하기 전에 번개같이 선제공격을 하여
말벌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
어찌 보면 다 마라톤을 한 덕분이 아닌가 한다.
마라톤으로 몸의 근육을 고르게 키우고
그 강화된 근력을 바탕으로 집중력과 순발력도 강화시켜
돌발위기에 매우 민첩하고 정확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3
체육공원에서의 말벌사태를 겪은 다음
왜 그 말벌이 나를 공격의 목표로 삼았는지
몹시 궁금하고 의아스러웠다
당시 공원에는 나 외에도
가까이에 남자 세 명과 여자 한 명이 더 있었다
떨어진 거리라고 해 봐야
불과 10m 이내의 거리에 다 있었다
공원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내 나이가 제일 들어보이니
말벌에게는 내가 공격하기 제일 쉬운
만만한 상대로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비록 나이는 제일 많아 보이나
운동기구를 이용하여 근력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다이나믹하게 움직이는 것이 제일 강한 놈으로 보여
이왕이면 가장 쎈 놈을 공격하자고
영웅심리가 작동하여 나를 선택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짧은 팬티에 민소매 티를 입은
내 야한 모습이 눈에 거슬려
풍기문란 단속의 본보기로
나를 혼내주려
나를 공격의 목표로 삼았거나,
하늘색 팬티와 휜색 티 중
어느 색깔이 말벌의 나쁜 감정을 유발시켜
나를 공격의 대상으로 선택하게 한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말벌이 그 여러 사람 중에
하필 나를 선택하기까지에는
나와 그 말벌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인과관계가 작용했을 것 같다
무작위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가 선택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4
아무튼 그렇게
내 마라톤을 위협한 적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
사람이 직접 관리하고 있는 문명세계보다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자연에 깊이 들어갈수록
내 마라톤을 위협하는 적들은 많아진다
한여름 푸른 숲은
멀리서 바라보면 한없이 평화롭게 보이지만
막상 숲 속에 들어가면
온갖 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멧돼지들이나 오소리나 너구리 같은 짐승들이야
인간이 지나가면 대개 스스로 몸을 숨기거나 피하지만
거미나 각다구와 모기 같은 날 것들은
사람의 발길이 뜸한 도처에서 거미줄을 쳐 놓거나 날아다니며
호시탐탐 달리는 내 몸에 공격을 감행한다
말벌은 그 날아다니는 적들 중에서도
매우 위협적이고 무서운 동물이다
숲 속 어디서든지 불쑥 나타나
그 강력한 독침을 앞세우고 순식간에 공격을 감행하기 때문에
체육공원에서 만난 말벌은
내 앞에 나타나 잠시 선회를 하며
내게 대비할 시간을 주었기 망정이지
나타나자마자 쏜살같이 공격을 했다면
이번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