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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티를 잃고 시계를 얻다  
이정범 조회 : 734, 추천 : 21

                     팬티를 잃고 시계를 얻다
  36km 경수 대간(대모산-구룡산-청계산-바라산-백운산-광교산-형제봉)종주 산악마라톤대회

결과를 놓고 보면 완전히 실패한 대회였다. 골인지점인 경기대 정문 근처 반딧불이 화장실을 4km 정도 남겨둔, 그것도 약간의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거의 완만한 내리막길인 형제봉 정상을 지나면서 크게 알바를 하는 바람에 성복동 방향으로 내려섰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참으로 어이없는 실수였다. 아니 실수라기보다는 무엇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형제봉 정상에 올라서서 바로 앞 주자를 따라간다는 것이 일차적인 화근이었다. 도마치 고개란 이정표가 아무래도 이상하여 앞 주자에게 신호를 보냈는데 지난 번 답사 때 반대편 방향에서 그 길로 올라왔다는 것이다.

일단은 믿어보기로 하고 계속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는 데, 앞 주자가 멈추더니 그 길이 아닌 것 같다 한다. GPS 시계가 그 길이 아니라고 안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형제봉으로 올라갈 자세였다. 형제봉에서 한 300m쯤(?) 내려온 지점에서 벌어진 일이다. 나는 다시 올라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 그냥 달려 내려갔다. 내려가다 보면 다시 경기대 정문 방향으로 표시된 등산로가 나타날 것이라 내 멋대로 예상하고….

그런데 그것이 2차 화근이었다. 성복동 마을에 내려설 때까지 경기대 방향을 가리키는 그 어떤 안내표시판도 나타나지 않고 등산객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집에 와서 컴퓨터로 검색하여 내가 내려온 길을 확인하니, 내가 내려온 길은 형제봉에서 경기대 방향과 무려 90도나 다른 방향이었다.

성복동에서 그냥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경기대쪽으로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골인지점을 목전에 두고 5시간 이상 달려온 길을 이렇게 허망하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거리를 많이 남겨 놓은 채 크게 알바를 하면 중간에 포기하려고 카드까지 배낭에 휴대했지만, 실패한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성복동 서쪽 편에 뻗어 있는 산줄기를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산줄기는 버들치 고개가 있는 산줄기였고, 그 산줄기 서쪽 편에 경기대 정문 쪽으로 가는 산줄기가 있었다. 여러 등산객들에게 묻고 물어 버들치 고개를 지나 형제봉 바로 밑에 있는 운암재로 올라가서야 겨우 경기대 정문 근처 반딧불이 화장실로 가는 등산로에 진입할 수 있었다.

운암재는 형제봉에서 1km 가량 내려선 고개인데, 그 곳을 거의 타원형으로 한 바퀴 크게 삥 돈 것이다. 5km 가량을 더 돌아 다시 정상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몸은 기진맥진했지만 그래도 운암재에서 반딧불이 화장실까지는 중간에 한 번도 걷지 않고 계속 달려 내려갔다.

사실 알바에 대비하여 11일 전에는 하오고개를 출발 반딧불이 화장실까지 이 코스를 훈련 겸 답사했다. 2년 전 오늘 코스와 조금 다르게 광교산에서 수지성당 쪽으로 골인하는 대회 때 우담산 근처에서 알바를 당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그런데도 어이없는 실수를 한 것이다.

답사 때는 한 번의 알바도 없이 그 코스를 통과했는데, 오늘 경기보다 느린 페이스였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봉에서 반딧불이 화장실까지 26분 29초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크게 알바를 하는 바람에 1시간 4분 29초나 걸렸다. 무려 38분이나 더 걸린 것이다. 오늘 기록이 6시간 15분이니 답사 때 페이스로 형제봉-경기대 구간을 여유 있게 달렸다 하더라도 5시간 37분 이내에 충분히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지금까지 수십 회의 산악마라톤대회에 나갔지만 이토록 큰 알바는 처음이었다. 나이 칠십을 코앞에 둔 나이에 정상적으로 완주했더라도 극심한 피로를 견뎌내기 어려울 판에 막판에 5km 가량을 더 달렸으니 몸은 말이 아니었다. 가중된 몸의 피로에 더하여 어이없는 실수를 한 나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정신력은 거의 붕괴 직전이었다.

게다가 이수봉과 국사봉 사이 내리막길에서는 속도를 내어 달리다가 무엇에 걸렸는지 앞으로 고꾸라지는 바람에 바른쪽 무릎과 팔꿈치 어깨에 부상을 당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피를 흘리는 혈전이었고 엎친 데 덮친 격인 설상가상의 악전고투였던 셈이다.

설상가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내리막길에서 구르며 상처 난 부위와 함께 땀으로 범벅이 된 몸도 대충 씻어야 하겠기에 반딧불이 화장실에서 손목에 찬 시계를 벗어서 분명히 가방 안에 넣은 것 같은데, 나중에 옷을 갈아입고 찾으니 안 보이는 것이었다. 기진맥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계를 벗어 가방에 넣는다고 넣은 곳이 가방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가방을 뒤진 다음 내가 씻었던 화장실과 잠시 누워있던 벤치까지 둘러봐도 행방이 묘연했다.

부상에, 큰 알바에, 시계까지 안 보이다니 이런 낭패가 없었다. 더구나 11일 전의 답사 때도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대충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벗은 옷과 양말과 모자는 비닐봉지에 챙겨 넣어 집에 가져왔는데, 세탁하려고 가방을 열어보니 유독 팬티만이 보이지 않아 심하게 내 자신을 자책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정신도 멀쩡해서 꼼꼼하게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되는데…. 무엇에 홀리지 않으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11일 전의 실수가 또 다시 같은 장소에서 재개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매우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되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마라톤 팬티와 시계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데…. 값으로 따지면 얼마 안 되지만, 나와 몇 년을 동거 동락한 나의 분신과도 같은 물건인데….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이 내 몸에서 쑥 빠져나간 것 같은 아득한 느낌이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늙어가는 나이 탓인가.

대회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사발 면을 받기 위해 골인지점 쪽으로 가니, 형제봉에서 도마치 고개 코스로 같이 잘못 내려섰던 선수가 나를 보더니, “선배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하고 사과를 한다. “자기 때문에 알바를 당하여 고생하셨다.”고…. 사과 받을 일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잘못 선택해 내린 결정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도 해서, “형제봉에서 뭔가에 홀려서 그리 된 것 같다”고 웃으며 그의 미안해하는 마음에 답례해 줬다.

좋지 않은 일이 연거푸 생기니 도무지 입맛이 돌지 않아 사발 면을 반 정도만 먹고 나머지 는 음식 쓰레기 잔반통에 버린다. 그래도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억지로라도 따듯한 국물과 함께 몇 젓가락 먹었더니 기진맥진했던 몸에 약간은 생기가 도는 것 같다. 사발 면을 먹는 동안에도 행방을 감춘 시계가 계속 머리를 맴돈다.

다시, 시계를 벗은 다음 가방에 없는 시계를 확인하기까지의 과정을 되돌려본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 가방은 몇 번이고 뒤져보았으나 대충 몸을 씻으며 가방을 넣어 두었던 물품 보관용 비닐봉지는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그 비닐봉지는 옷을 갈아입고 배낭을 챙기자마자 곧바로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나를 그토록 자책케 하는 마라톤시계는 그 비닐봉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서둘러 화장실에 올라가서 버린 비닐봉지를 찾아 확인하니 역시 봉지 안에 그 시계가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아, 그 순간의 놀라움과 기쁨이라니….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다면 그와 같지 않을까. 온몸에 가득했던 먹구름과 피로가 일시에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오늘 대회에 참가하여 가장 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계를 벗어 가방에 넣는다는 것이 아마 잘못 넣어져 가방 밖 비닐봉지 안에 있게 된 것 같았다. 만약 더 이상 시계를 찾을 생각을 포기하고 대회장을 떠났더라면 몸도 마음도 향후 며칠은 천근만근 무거웠을 것이었다.

시계를 찾으니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6시간 15분 동안 잠시도 멈추지 않고 걷고 달리며 기진맥진했던 몸이 이토록 순식간에 돌변할 수 있단 말인가. 뭉친 하체근육도 풀 겸 경기대 정문에서 후문을 거쳐 지하철 신분당선 광교역까지 걸어서 가는 2km가량의 길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했다.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주어, 넘어지며 입은 상처는 조금 쓰렸지만 상처에 감기는 바람은 더욱 감미로웠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도, 집에 와서 아내가 딸의 첫 손녀 출산으로 삼척에 가 있어 직접 저녁을 준비해서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세탁을 하고, 40분가량 늦은 산책을 하면서도, 전혀 피곤함을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이런 행복감은 저녁 10시 30분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장시간 격렬한 것이 내 몸을 통과하며 불순물들을 말끔히 배출해내서인지 눈을 감고 잠을 자는데도 의식은 눈 뜨고 있는 상태보다 훨씬 또렷하고 투명하였다. 얼마나 각성된 상태가 잠속에서도 계속 유지되었는지, 잠을 자면서도 몇 편의 시가 눈 뜨고 있을 때보다도 훨씬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였다. 대게 잠을 깨면 금방 사라지는데 새벽에 잠을 깨서도 잠속에 있었던 시는 눈 뜬 의식 속에 뚜렷했다.

이러한 기이한 체험에도 불구하고 이제 앞으로는 극기 훈련에 가까운 장거리, 장시간의 산악마라톤은 하고 싶지 않다. 4시간 정도의 산악마라톤은 날씨가 더운 여름철에 좀 더 시원한 그늘을 찾아 풀코스 마라톤 경기나 훈련을 하는 셈 치고 계속 할 수도 있지만, 5시간이 넘는 산악마라톤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70이 가까운 나이에 계속 자기 한계에 도전하는 것도 좋지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을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극선

이 더위에 6시간을 뛰다니...
대단합니다...몸은 무리할수록
더 좋아집니다....극한의고통을 겪고나서 마무리를 잘하면 만족감도 커지죠
나도 함 해보고싶네요....
19.06.18
09:42:00




선배님?

감동을 주는 체험담을 애독하는 열렬팬입니다^^~
스피드를 좀 자제하시고 70까지 버텨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선배님의 눈부신 활약상이 후배들에게 얼마나 귀감이 되고 동기부여가 되는지 모르시죠?
그냥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자근심 높이는 것 아닐런지...
되찾은 시계가 주는 행복감?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없었던 사건이라도 일상에서 가정할 수 있으면 늘 행복하시겠습니다~
19.06.18
11:16:47




달리이

고생하셨네요...
근데 마라톤 팬티가 아니고 마라톤팬츠라고 해야 맞을듯합니다.ㅋ
19.06.18
13:17:52




독주

열혈팬 추가입니다ㅎ
감동과 여운을 주시는 글 매번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19.06.18
13:49:27



이 름
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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