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개구멍
이 정 범
1970년대 초반 내 군대 생활하던
그 엄혹한 유신 시대에도
군부대 철조망에는 낭만이 있었다.
군단사령부에 파견근무 시절
부대 동쪽 편 산기슭 철조망에는
부대 바깥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한 사람 겨우 허리 90도 이하로 굽히고
머리 숙여 빠져나갈 수 있는
개구멍이 있었다.
일과시간이 끝난 다음
저녁 어스름에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
산 밑 민간인 가게에 내려가 막걸리를 사와서는
점호가 끝난 다음 반합에 건빵 넣고 라면 끓여 안주로 먹으며
가끔 황홀한 저녁을 보내기도 했었다
나는 그 때 그 개구멍을
자유의 문이라고 불렀다
위에서도 누군가는 알고 있었겠지만
제대할 때까지 누구 하나 그 문을 막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 때 그 철조망에
그런 문 하나쯤은 남아 있는지
얼른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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